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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브렉시트 뒤 분노의 민심, 한국도 예외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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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의 후폭풍이 몰아치면서 영국인들 스스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 전파되고 있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지(#WhatHaveWeDone)’라는 해시태그가 그런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자해하고 후회하는 격이다. ‘팩트(fact)’에 기반하지 않은 무책임한 논쟁으로 여론을 호도한 정치인들 탓이 크지만 분노에 사로잡혀 냉정을 잃은 유권자들도 책임에서 자유롭진 못하다.

영국 정치권은 잔류파와 탈퇴파로 양분돼 서로 ‘공포 마케팅’을 벌였다. 탈퇴파는 2020년 터키가 EU 회원국이 되는 순간 수백만 명의 터키인들이 영국으로 몰려올 것이라며 반(反)이민 정서에 불을 질렀다. 그때까지 터키가 EU에 가입할 가능성은 로또에 연속 두 번 당첨될 확률과 비슷하다. 잔류파도 무책임하긴 마찬가지였다. 확인도 안 되는 온갖 수치를 들이밀며 브렉시트로 영국이 보게 될 피해를 부풀렸다.

상호연계와 상호의존이 갈수록 심화되는 21세기에 고립과 폐쇄를 택한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정상이 아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냉정을 잃은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세계화 과정에서 낙오하고 소외된 저소득, 저학력, 비숙련 노동자 계층의 쌓인 좌절감과 분노가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해 온 기존 질서를 뒤집는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민자에 대한 문호 개방과 국경 없는 자유무역의 혜택이 소수에 집중되면서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데 대한 분노가 자학적 선택을 촉발한 셈이다. 브렉시트로 영국 경제가 위축되고 일자리가 줄어든다면 우선 피해를 볼 사람들은 바로 브렉시트를 가장 열렬히 지지한 계층이다.

양극화 현상은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미국에서는 ‘1% 대(對) 99%’의 사회를 비판하는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벌어졌고, 이는 올해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 현상으로 이어졌다. 경선 과정에서 샌더스와 트럼프가 얻은 표를 합하면 2500만 표로, 힐러리 클린턴의 1600만 표보다 훨씬 많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양극화 속에 흙수저·금수저 논쟁이 불거지면서 취업난과 주택난에 시달리는 20·30대 계층의 불만이 폭발 일보직전이다. 지하철역 ‘포스트잇’ 시위가 그 징표다. 세대 갈등에 더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갈등도 심화되고 있다. 분노의 표심은 4·13 총선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브렉시트로 인한 대외여건의 엄중함을 지적하고, 범정부적 위기대응 체제를 주문했다. 브렉시트의 여파에 대응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브렉시트의 원인이 된 대중들의 좌절과 분노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양극화 문제의 심각성을 정부와 여야 정치권은 깊이 인식하고, 협치다운 협치를 통해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