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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병을 진단한다<2>이제훈특파원 런던상주 2년|파업 외면하는 노조원 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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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85년3월4일은 영국노조투쟁사에 하나의 역사적 분기점을 그은 날로 기록될 것이다. 수상을 바꿔치기도 하는 막강한 힘을 휘두르며 국가속의 국가로 행세해온 야생마와도 같았던 영국의 노조가법질서와 국가이익이라는 울타리속에 드디어 길들여지기 시작한 전환점이 될수있기 때문이다.
장장 1년간 온갖 수단을 다동원해서 파업투쟁을 벌여왔던 탄광노조가 지칠대로 지쳐 백기를 들고 정부에 항복한 날이다.
탄광노조의 파업은 소련등 동구공산국가 (노조)들과 리비아의 「가다피」 정권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가며 1년간 끄는 동안 ▲사망3명 ▲경찰부상 3천5백명 ▲광부연행 9천여명▲경제적 손실30억파운드 (약3조6천억원)의 피해를 내는등 엄청난 희생과 댓가를 지불했다.
이 파업은 적자를 많이보는 탄광 20여곳을 폐광하고 거기에 소속된 2만여 광부를 해고하겠다는 석탄공사 경영진의 발표에서 비롯된것인데 거기에만 그치지 않고 노조를 거세시키겠다는 「대처」 정부의 타도를 겨냥한 정치투쟁으로 변질됨으로써 확산일로를 달리게 되었던것.
건곤일척의 결단으로 일으킨 탄광노조의 파업투쟁이 좌절된 것은 따라서 노조로서는 결정적 타격이 아닐수 없다.
영국의 노조는 74년에 「히드」 보수당정부를, 79년에는 「캘러힌」 노동당정부를 무너뜨린 혁혁한(?) 전력을 갖고있다.
노조가 한창 성세에 있었던 76년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설문의 갤럽여론조사에서 당시 운수일반노조 (영국 최대노조)의 「잭·존즈」 위원장이 54%의 지지를 받은 반면 「캘러헌」수상은 25%, 당시 야당당수 「대처」는 5%의 지지밖에, 못얻었었다.
BBC-TV의 코미디 같은데서 수상을 임명하는 사람은 여왕이아니라 「잭·존즈」라는 얘기를 공공연히 했다.
영국에는 4백38개의 노조가 있고 이가운데 전국노조평의회 (TUC)에 가입된것이 1백8개나된다.
더타임즈 신문사 한군데만 68개의 노조분회가 있고 한개 자동차회사에 50∼60개의 노조지부가 있는 실정이다.
이들 노조중 어느 한군데서라도 파업을 벌이면 그 회사나 공장은 스톱되는 판이다. 이른바 피키팅 라인을 넘을수 없는것이 불문율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1868년에 착취당하고 억압받던 노동자들의 권익옹호와 노동조건개선을 위해 만들어진 영국의 노조는 그 동안 근로자의 권익신장과 영국민주주의의 발전을위해 찬란한 공적을 쌓아왔다.
지금도 그 역할을 안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력행사의 관록이 쌓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병리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노조파업의 고질이 생겼다. 그래서 유럽의 병자라는소리를 듣게까지 된것이다.
노조의 실력행사가 빈번하고 공장의 문이 닫힐때가 많아짐에 따라 당연한 귀결로 영국경제는 급전직하, 76년에는 IMF (국제통화기금)의 감리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노조투쟁의 극성은 다시 79년에 되풀이 되어 한때 전국의 산업이 마비되는등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로 이름붙여졌던 암울했던 시절을 겪게된다.
그 암울한 상황을 덜고 79년 집권, 등장한것이 철의 여재상 「대처」정부.
「대처」는 노조의 버릇을 고치지 않고는 영국병을 치유할수 없고 영국병을 뿌리뽑지 않는한 영국의 장래는 없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집권 직후 노조파업을 규제하기위한 고용법을 제정하고 국가안보를 이유로 정부통신본부(GCHQ)의 노조 를 해체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GCHQ는 영국의 대외정보업무를 관장하는 곳으로 말하자면 정보부같은 곳이다.
노조를 탈퇴하는 직원들에게 1천파운드 (1백20만원)의 특별보상금을 지급하는 미끼를 내걸고GCHQ의 노조를 없애는 작업을 벌였던것.
이쯤되자 TUC산하 각 노조가 들고일어나 일제 파업선언을하고 신문들도 동조파업을 벌였다.
「대처」수상은 「철의 여재상」답게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GCHQ의 노조를 사실상 분해시켰다.
「대처」수상의 강인한 의지는 뒤이어 전개된 석탄노조와의 대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84년8월에는 전국의 항만부두노조가 석탄노조에 동조, 파업을 일으키는 바람에 정부는 비상조치를 검토할만큼 위기로 치닫는 상황이었다.
파운드화는 폭락하고 수출은 격감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석탄노조의 파업투쟁을 꺾은것이기 때문에 「대처」로서는 포클랜드전쟁에 못지않은 승리로 치부되었다.
「대처」집권이후 계속된 파업투쟁에서 번번이 실패를 맛본 노조는 그들의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노조의 투쟁방식에 대한 반성이 높아갔다.
탄광노조의 파업투쟁이 실패하고 여러차례 시도된 다른 노조파업투쟁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것은 물론 「대처」정부의 강력한 의지때문만은 아니다.
일반국민과 노조원들 자신의 인식이 크게 바꿔기 시작한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일것이다.
탄광노조 지도부가 파업투쟁을 전개할때 처음부터 4분의1에 달하는 노조원은 가담하지 않은채 계속 작업을 했으며 부두노조파업때도 마찬가지였다.
철강노조는 석탄노조의 끈질긴요구에도 불구하고 동조파업을 완강히 거부했다. 운수노조에서 파업지령을 내려도 맹종을 거부하며 계속 버스나 기차를 운영하는 지부와 노조원들이 크게 늘어났다.
아무리 노조투쟁이라도 법질서의 테두리에서 해야한다는 생각과 지금과 같은 경제가 어려운때에 파업을 해서는 국가이익에 도움이 안된다는 인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것이다.
3백20만명에 달하는 대량실업과 불경기, 그리고 「대처」 정부의 강력한 지도력이 노조파업병을 치유하는 처방으로 효과를 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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