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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다니엘의 문화탐구생활] 흰 양말에 샌들 신으면 독일인이라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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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앙포토]

나는 패션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패션에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한국에서 옷차림으로 평가받는 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 사람들은 옷을 잘 입는 것 같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모두 계절에 맞는 옷을 깔끔하게 갖춰 입은 걸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언젠가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에서 ‘한국에선 옷을 잘 입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는 내용을 읽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예의 차원’으로 더욱 옷차림에 신경 쓰고 있다.

예전에는 패션엔 정답이 없고, 남들 시선이 어떠하든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요즘은 ‘나의 패션이 독일 사람 전체의 패션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얼마 전의 일이다. 친구들끼리 가볍게 등산하러 북한산에 갔는데, 청바지에 티셔츠 입은 나를 보더니 “등산할 준비가 안 됐다”며 친구 녀석들이 한마디씩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에베레스트 등정하는 것도 아니고 세 시간 동안 북한산 산책하는 건데, 비싼 등산복이 왜 필요하냐?”고 묻자, “역시 독일 패션 테러리스트”라는 놀림이 돌아왔다. 더구나 ‘비정상회담’(2014~, JTBC) 멤버들은 내 패션에 대해 늘 이렇게 말한다. “역시 독일 사람!” “다른 독일인처럼 흰 양말에 샌들 안 신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렇게 번번이 옷차림에 대해 놀림당하다 보니, 독일 패션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크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독일 사람들은 패션 센스가 없는 것으로 유명한 것일까.

실제로 주변 지인들과 이야기 나눠 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독일 사람에게 두 가지가 부족하다고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유머 감각과 패션 감각. 이탈리아에서는 보통 흰 양말에 샌들 신으면 독일 사람이라 생각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가죽 반바지에 양말을 끝까지 올려 신으면 독일 사람이겠거니 추측한다. 나 역시 양말 색깔 때문에 놀림받은 적이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얼마나 뜨끔하던지.

그래서 독일 패션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던 중 신기하고 놀라운 내용을 알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 전역이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먹고사느라 바빠서 자기 외모에 신경 쓰지 못했다. 옷 만들 실도 없고 옷 만드는 기술도 없던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은 테이블보로 아무렇게나 옷을 지어 입었다. 신발도 자동차 바퀴의 고무를 떼어 만들었다고 한다. 1950년대를 지나면서 독일 패션은 조금씩 발전하기 시작했다. 서독의 경제 부흥을 뜻하는 ‘라인강의 기적’이 일어나면서, 독일 사람들도 점차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와 브랜드 중에는, 의외로 독일 출신이거나 독일에서 시작된 것이 여럿 있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칼 라거펠트(83)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 스웨덴 출신 아버지와 독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952년 프랑스로 이주해 끌로에와 펜디 등의 브랜드에 날개를 달아 줬다. 이어 1984년부터 샤넬 제국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한 ‘패션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향수가 유명한 휴고 보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위한 군복 디자인으로 비난받았지만, 이후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여 독일의 대표적인 남성복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1990년 동독과 서독이 통일됐을 때만 해도, 사실 독일에는 자신 있게 언급할 만한 패션 중심지가 없었다. 그러나 수도를 본에서 베를린으로 옮기면서 독일 패션 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현재 칼 라거펠트, 질 샌더, 욥, 휴고 보스, 마크 오폴로와 같은 다양한 독일 의류 브랜드가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요즘 들어 독일 패션계에 공통적인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바로 심플하고, 캐주얼하며, 자연을 생각해 만든 옷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더 실력 있는 독일 디자이너들이 등장해 독일인의 패션 센스를 보여 주길 기대한다. 그렇게 된다면 ‘흰 양말에 샌들 신는 사람이 독일인’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 칼럼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이제부터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그저 다니엘이 옷을 조금 못 입는 것뿐이지, 독일 패션은 세계에서 꽤 잘나가고 있다는 걸 말이다.

글=다니엘 린데만. 독일 사람? 한국 사람? 베를린보다 서울의 통인시장에 더 많이 가 본, 이제는 한국의 다니엘! 1985년생 소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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