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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쟁보다 인신공격·모함이 판쳤다|인공이냐 임정이냐 임정측 "소사주받아 탁치 지지한 매국노집단"|인공측 "해외혁명세력의 하나로 친일파 비호"|양파 통합시도에 실패하고 소멸|심지연<경남대교수·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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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건준의 조직을 이어받아 9월초부터 전열을 갖추어 온 인공과 11월말에 귀국했지만 해외망명정부라는 후광을 안고있는 임정사이의 정치논쟁은 대개 두가지 사항으로 요약된다. 첫째 이들이 과연 정부로 자처할만한 합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가하는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정통성 또는 합법성의 문체로 귀결된다. 둘째 주로 어떠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것으로 지지기반의 문제라고 볼수있다.
인공은 9월6일 밤에 개최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정부수립의 논리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날 각계각층을 망라한 전국의 대표자들이 모여 민족의 장래를 진지하게 토론한 결과 정부를 즉시 수립하기로 결의했고 여기에서 이름을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라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를 조직하고 이를 운영할 인민위원이 선출되어 비로소 독립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공의 선포시 1천여명이 참석했다고는 하지만 하루밤 사이에 정부를 수립한것은 아무리 「비상한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정부를 수립한다고 하면서 국민적 토론이나 합의과정을 간과한것은 어떠한 설명을 하더라도 국민의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수 없기때문이다.
더군다나 동일한 이념을 갖고있지 않다고 해서 정부수립과정에서 반대세력을 배제하고 민주주의의 기본요소인 선거를 생략한것은 스스로 비난의 여지를 만든셈이었다. 따라서 한민당으로부터 『일당독재를 꿈꾸는 행위』 라는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건준을 모태로 하여 인공을 선포한 것은 내용이야 어쨌든 『일제의 정치적 유산을 그대로 존속하려 한 것』이라는 문제점도 지적되었다. 왜냐하면 건준에서 인공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정치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선출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족적인 선출과정에 의해 정치지도자가 여과되지 않는 한 친일정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제의 정치적 유산이라는 비난을 모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대세력을 배제 선출과정 안밟아>
따라서 인공의 선포는 그에 관련된 사람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영웅주의적 행위의 산물이라는 평을 받게 된다.
인공의 경우 스스로가 합법성을 강조한 반면, 임정의 경우는 이와 달리 임정을 지지한 정당·사회단체에서 임정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정부로 추대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국민대회준비회와 한민당이 이를 위해 총력을 기을였다.
이들의 주장은 우선 임정이 3·1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수립되었으며 그후 『27년동안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해온 유일한 정부』라는 것이다. 이들 임정요인들이 해외에서 투쟁하고 조국동포를 지도하며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였기에 오늘날 독립이라는 선물을 국민들에게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해방후 이들이 곧바로 귀국하지 못한 틈을 타서 『일부 교만한 분자들이 정부를 참칭』했다는 것이다. 기존해 있는 임정에 대립하는 이러한 행위는 민족적 양심에 비추어 용납할 수 없는 행위로 이를 하루빨리 중지하고 『임정지지를 지상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한민당은 주장했다.
또한 임정은 연합국과 같은 대열에 서서 항일투쟁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에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임정은 『3천만 민중을 감복시킬만한 권위』를 갖고있다고 주장했다.
임정의 정통성을 강조한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도 인공측으로부터 만만치않게 제기됐다.
우선 임정이 유일한 해외혁명세력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으며 단지 해외혁명세력의 하나일뿐이하고 주장했다. 즉 만주·시베리아·미주등지에도 독립운동단체들이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의 활동도 활발하고 업적도 혁혁하기때문에 임정만을 유일한 세력으로 인정할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임정을 유일한 정부로 추대할 경우, 이등 모든 해외세력을 포괄할수 없다고 반박했다.

<박헌영발언 큰파문 탁치반대하고 번복>
『소수의 불량분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임정을 지지한다』는 한민당의 주장에 대해서도 인공측은 역시 반론을 제기했다. 이는 국내·국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의 총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하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임정요인들이 단지 『해외라는 유리한 환경하에서 민적적 절개만 지켰을뿐 무원칙한 정권욕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다 귀국』했다는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국내의 국민대중과는 하등의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민족적 지지를 받고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비난했다.
또한 임정은 실체면에서도 외부적으로 선전된 것과는 많이 다르다고 인공측에서 주장했다. 임정이 연합국의 승인을 받은 정부도 아닐 뿐만 아니라 15만명의 광복군과 함께 귀국할 것이라는 한민당의 선전도 사실과 동떨어진 과장이라고 주장했다. 임정을 정식으로 승인한 국가가 없어 외교사절을 교환한 적도 없으며 백범의 귀국성명이나 「하지」의 성명에서도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고 밝혔기 때문에 정부운운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인공과 임정은 논리적으로 각각 이러한 결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논쟁이 계속될수록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이 빈번히 일어났다. 즉 어떠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지하는 층은 누구인가에 대한 공격에서 인격적인 모함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종류의 논쟁은 인공과 임정이 직접 벌였다기 보다는 각각 이를 지지하는 청년조직을 통해 어루어진 것이 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임정을 지지하는 측으로 대한청년의혈당·고려청년당등이 인공요원에 대한 비난을 주로 하고 있으며 인공을 지지하는 측으로 조선청년총동맹이 임정요인에 대한 인신공격에 앞장섰다. 이러한 인신공격은 감정상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어 양자간의 통합을 이루어 보려는 어떠한 시도도 결실을 보지 못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였다.
인공의 경우 우선 활동자금의 출처가 크게 논란의 대상이 됐다. 당시 대한청년의혈당에서 살포한 비라에 의하면 인공은 관동군참모부로부터 5천만원, 총독부경무국으로부터 5백만원, 조선헌병사령부로부터 2백만원, 일본인세화회로부터 5백만원을 받았으며 기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로부터도 자금을 받아 활동했다는 것이다.
인공은 이 돈으로 인민위원회의 활동자금과 신문기자의 매수자금으로 썼다는 비난을 받았다. 건준도 8·15직후 총독부로부터 4백50만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제공받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같은 비난들을 확증할만한 자료는 아지 제시되지 않고 있다. 건준파 인구(의 자급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면밀한 분석이 요청된다.
또한 인공은 후일 신탁통치를 지지함으로써 『소련에 나라를 팔아 넘기려는 매국노집단』이라는 비난까지 받게 되었다. 인공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이나 지지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소련의 사주를 받고 이들이 신탁통치를 찬성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난은 46년1월5일 박헌영의 기자회견을 둘러싸고 더욱 가중되였다. 이자리에서 박헌영은 뉴욕타임즈지의 기자에게『소련 한나라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장차 소련의 일개 연방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박헌영개인은 물론 조선공산당과 인공의 이미지가 치명적인 손상을 받게 되였다.
인공의 정적들이 이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인공에서는 이를 정적들의 모함이라고 주장하고 소문을 막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는 이를 비라로 만들어 살포하고 박헌영의 발언은 『한민족의 영원한 노예화를 음모하는 공산당의 정체』라고 비난했던것이다. 한민당·독촉·국민당·대한청년당·여자국민당등 38개 정당·사회단체가 1월16일 한민당본부(동아일보사 3층)에 모여「매국적징치 각단체 긴급협의회」를 결성하고 박헌영을 매국매촉행위자로 징치할것을 결의했다.
신탁통치문제가 처음 제기되었을 때 이를 반대하던 입장에서 찬성하는 입장으로 태도를 바꾸었기 때문에 정치적 변절이라는 비난을 받다가 또다시 소련에의 편입을 희망했다는 인공반대파의 선전이 주효해 인공은 매국노집단이라는 풍문에 휩쓸려 정치걱으로 커다란 곤경에 처한 것이다.
인공이 매국노집단이라는 풍문에 휩싸여 시련을 겪었다고 한다면 임정은 친일파 비호집단이라는 비난으로 정치적인 곤경을 겪었다.
귀국하기 건에 임정요인은 중국의 국민당정부와 9개항의 밀약을 맺고 한국의 외교권을 담보로해서 매달 3백만달러의 자금을 받았다고 비난하는 비라가 한때 나돌았다.
임정은 귀국한 후 비밀연락소를 차려놓고 일제시대 고급관리였던 고등문관 출신이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행정연구회」를 만들게 하고 이를 일종의 두뇌집단으로 활용했다. 이 연구회는 45년12월에 발족되어 48년2월까지 존속했는데 사직공원 앞 야전피복공장 건물안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50여명의 고등문관출신들이 모여 임정을 위해 각종 정책과 이론을 개발했다. 즉 이들은 각종 반공이론을 제시해 인공과 공산당의 논리에 맞섰을뿐만 아니라 반탁이론, 미·소 공위당신안작성등의 업무를 맡아 임정의 활동에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이 연구회에 참여했던 사람중의 하나는 『일정때 관리를 지낸 죄인으로서 임정이란 민족의 추앙을 받던 단체에 봉사하여 속죄의 길을 발견했기 때문』에 무한한 행복감을 느꼈다고 회고할 정도로 임정에 대한 연구회의 기여는 대단했던 것이다. 임정의 이러한 조치가 인공측의 눈에는 친일파 옹호행위로 비친것은 물론이었다.
또한 친일파문체에 대해 백범이 『깊은 이해와 정애로써 임해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으므로 국민들은 마음놓고 생업에 임하도록 하라』는 내용의 비라가 나돌기도 했다. 이는 임정지지단체인 조선애국부녀동맹에서 만든것으로 소위 친일파에 대한 김구주석의 대사방침- 『동포여 홍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자』라는 제목으로 뿌려졌다.

<참된 임정 수립하자 여운형 양측에 권고>
이러한 방침은 임정이 자신의 정치기반을 보다 광범위하게 구축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국민들이 증오하던 친일파를 건국과업에 참여시키려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임정요인들은 귀국후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제시대의 행적을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제휴하려했기 때문에 소극적이나마 지켜오던 민족적 절개를 포기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양측의 논쟁이 계속되던중인 12월19일 서울운동장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개선전국환영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대회에서 임정이 유일한 정통정부임을 선언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독립국가를 건설할것과 이에 대입되는 조직을 해체할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했다.
이에 대해 인공측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고 밝힌 사람들을 정부로 환영하려는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반박했다.
임정을 지지한다는 명목하에 과거의 친일행적을 감추고 자신의 지위와 이익을 연장시키려는 의도가 내재된 대회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주최측이 학생과 민중을 강제로 동원함으로써 임정이 전민중의 지지를 받고있는 것처럼 과장했다고 비난했다. 이로인해 민중은 기만당하고 임정요인은 자기도취에 빠져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이 불가능해졌다고 인공측은 주장했다.
인공과 임정이 이처럼 대립하여 상호 비난을 멈추지 않자 여운형은 『기성정부를 고집하는 것은 통일전선 결성에 장애가 될 뿐』이라고 주장하고 인공과 임정을 동시에 해체하여 『각당 각파를 합쳐서 건국회의를 열고 여기서 참된 임시정부부를 수립할것』을 양측에 권고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고 또 여운형 자신이 이를 제안할수 있는 적절한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질수 없었다.
그 자신이 임정의 권위를 부인하며 건준을 조직하고 인공을 선포했기 때문에 임정으로부터 신임을 잃었으며 또한 인공내에서의 그의 위치도 공산당측에 밀려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측사이의 논쟁은 이미 인신공격으로까지 확대되어 감정상으로도 통합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해방후 정부를 자처했던 두개의 단체는 민족적인 활로를 공통으로 모색하는데 힘을 합치지 못한채 역사속으로 소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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