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수대] 헌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지난 6월 27일 세상에 나온 '대한민국 헌법'(박영률 출판사)은 헌법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2백24쪽의 이 책은 88쪽이 사진이다. 나머지 1백30여쪽은 1백30개의 헌법조항이 한 쪽에 한 조항꼴로 해설없이 들어가 있다.

활자보다 여백이 많은, 헌법 한 조항을 읽으면 바로 컬러 사진이 펼쳐지는 그림책 같은 독특한 디자인이 독자로 하여금 "도대체 대한민국 헌법이 뭔가"라는 상념으로 안내한다.

러시아 첩보위성이 찍은 대동강이 한가운데로 흐르는 평양의 모습, 월드컵 미국전 때 서울 시청 앞에서 비를 맞으며 경기를 지켜 보고 있는 얼굴들, 추위를 피해 화장실에서 잠자고 있는 노숙자, 한국인의 유전자 지도, 해체하기 직전의 조선총독부 건물과 하늘에서 바라본 한반도 남단 마라도의 전경….

이 책의 온갖 한국적인 영상들은 헌법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임을 느낌으로 전해주고 있다.

헌법은 진화하는 생명체다.

1948년 유진오(兪鎭午.1906~87)박사가 기초한 최초 헌법의 1조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했다.

유감스럽게 兪박사는 친일 행적이 문제가 됐다. 그 후로 아홉번의 헌법 개정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때 두번,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다섯번, 전두환 대통령 때 두번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87년 시민헌법'이 나올 때까지 헌법의 평균수명은 4년10개월이었다. 대부분 대통령 권력을 강화하거나 장기집권을 목표로 한 개헌이었다. 잦은 개헌으로 누더기 헌법이라는 한탄도 있다. 하지만 시대의 산물인 헌법을 역사의 눈으로 따뜻하게 봐줄 때도 된 것 같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법적 토대를 세웠고,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적 정통성을 확보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민중의 힘에 몰려서긴 하지만 단임약속을 실천했다.

그는 민주화 세력이 세번이나 집권열매를 본 87년 헌법의 탄생을 유혈 충돌 없이 받아들였다. 6.10 민주항쟁의 꽃인 87년 헌법은 16년간 씩씩하게 자라왔다.

이 시민헌법 시대에 우리는 비로소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2항을 실감하고 있다. 55주년 제헌절을 이틀 앞두고 헌법의 고마움, 국민의 힘, 역사의 연속성, 조국애 같은 구절이 떠오른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