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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현장] 도핑과 반(反)도핑의 숨바꼭질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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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환, 에루페, 샤라포바 등 세계적 스타들 금지약물 복용하다 퇴출 위기에 몰려… ‘확실한’ 효과만큼 부작용도 커, 암페타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잦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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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영의 간판스타 박태환의 4회 연속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다. 금지약물 복용으로 국제수영연맹(FINA)으로부터 18개월 자격정지 처분을 받은 박태환이 지난해 3월 기자회견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중앙포토]

‘마린 보이’ 박태환(27)과 케냐 출신 마라토너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28). 두 사람은 지난 4월 6일, 나란히 깊은 좌절을 경험했다. 대한체육회가 개최한 제1차 스포츠공정위원회 결과가 그들을 나락에 빠뜨렸다.

0.001초로 갈리는 승부 ... 승자는 돈방석에 앉는다

대한체육회는 금지약물 양성 반응을 보인 선수는 징계 만료 후 3년간 국가대표로 뛸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을 고치지 않기로 했다. 이에 따라 올해 8월 열리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해 명예 회복을 하겠다던 박태환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스포츠공정위원회는 또 에루페가 신청한 특별 귀화를 법무부에 요청하지 않기로 했다. 2011년부터 한국에서 열린 6차례 국제 마라톤에 출전해 모두 우승했던 에루페는 2012년 도핑 테스트에서 적발돼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으로부터 2년 자격정지 징계를 당한 적이 있다. 에루페 측은 “말라리아 치료를 위해 복용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핑 스캔들’이 전 세계 스포츠계를 뒤흔들고 있다. 올해 초에는 러시아 테니스 스타 마리아 샤라포바가 금지약물인 멜도니움을 10년간 복용한 사실이 발각돼 퇴출 위기에 몰렸다. 러시아와 케냐 육상 선수들은 집단 도핑으로 올림픽 출전길이 막히게 됐다. 우리나라도 축구선수 강수일, 프로야구 최진행, 배드민턴 스타 이용대 등이 도핑 파문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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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핑은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걸까. 걸리면 패가망신하는 게 뻔한데도 왜 선수들은 도핑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걸까. 도핑은 신체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줄까.

끊이지 않는 의문을 안고 고려대 의대 김한겸 교수(병리과)를 찾아갔다. 김 교수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 위원장을 맡았다. 이른바 ‘박태환 도핑 파문’이 터졌던 2014년 9월에도 김 교수는 KADA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김 교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고의로 했든, 모르고 했든 심지어 잠든 사이에 누가 놓았든 도핑 양성반응이 나오면 책임은 100% 선수에게 있다. 이게 바로 세계반도핑기구(WADA)의 ‘무관용 원칙’이다. 도핑으로 스포츠가 망가지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이런저런 사정을 봐주기 시작하면 도핑은 절대 근절할 수 없다.”


l 약물 계속 복용하면 여성이 남성으로 성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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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 위원장을 맡았던 고려대 의대 김한겸 교수는 “고의로 했든, 모르고 했든 도핑 양성반응이 나오면 책임은 100% 선수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오상민 기자

도핑(Doping)은 포도껍질로 만든 알코올성 음료를 지칭하는 네덜란드어 도프(Dop)에서 유래했다. 20세기 초 보어 전쟁 당시 남아공 줄루족 전사들이 전투력 향상을 위해 복용했다고 한다.

이후 기력이나 경기력을 높이기 위해 각종 약물을 복용하는 행위를 ‘도핑’이라고 부르게 됐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덴마크의 사이클 선수인 커트 젠센이 흥분제인 암페타민을 과다복용해 경기 도중 급사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1967년 세계 최고 권위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에서 토미 심슨(영국)이 암페타민 복용으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의무분과위원회가 설치됐다. 그리고 1968년 그레노블 동계올림픽에서 처음 도핑 검사가 도입됐다.

WADA(World Anti-doping Agency)는 1999년 IOC 산하 기구로 창설됐다. WADA는 국가별 도핑방지 기구를 관장한다. KADA(Korea Anti-doping Agency)에서 실시하는 모든 도핑 테스트의 결과는 WADA의 도핑관리 시스템인 ADAMS에 입력된다.

WADA는 매년 9월 신규 금지약물 리스트를 발표하고, 다음해 1월 1일부터 적용한다. 일반 의약품으로 개발됐는데 선수가 먹고 효과를 봤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체크를 시작한다. 지속적으로 경기력 향상에 도움을 줬다는 확증이 나오면 도핑검사 리스트에 올린다. 샤라포바가 복용했다는 멜도니움도 올해부터 리스트에 포함된 약품이었다.

김 교수에게 ‘실제로 도핑의 효과가 있는지’ 물었다. 그는 “확실한 효과가 있으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하려는 것 아니겠느냐”라며 “요즘 기록 경기는 0.001초로 승부가 갈린다. 금지약물을 복용해 적혈구가 늘어나면 산소운반 능력이 커진다. 그렇게 만든 몸으로 우승하면 상금과 연금, 광고 수입 등 돈방석에 올라앉는다. 나라도 유혹을 느끼겠다”고 답했다.

김 교수는 “도핑의 효과가 확실한 만큼 부작용도 크다”고 했다. “약물은 선수의 육체와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암페타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건 한두 사례가 아니다. 스테로이드를 증가시키는 테스토스테론은 워낙 부작용이 커서 환자를 대상으로 쓸 때도 용량을 미세하게 조절해야 한다. 여성이 테스토스테론을 계속 복용하면 수염이 나고, 심지어 남성으로 성이 바뀌기도 한다.”

도핑 양성반응이 나온 선수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가 “(금지약물인줄) 모르고 맞았다”는 것이다. 근육강화제인 테스토스테론이 함유된 ‘네비도’ 주사를 맞았던 박태환도 “병원에서 제대로 얘기를 안 해줬다. 억울하다”고 했고, 지구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EPO(Erythropoietin)가 검출된 에루페도 “말라리아 치료제를 복용한 뒤 도핑에 걸렸다. 약에 그 성분이 있는 줄 몰랐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WADA는 꿈쩍하지 않는다. 도핑이 이미 퍼질 대로 퍼졌고, 수법도 갈수록 정교하고 교묘해지는데 이런저런 사정 다 봐주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l 암스트롱 때문에 억울하게 당한 이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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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귀화를 신청해 화제를 모은 세계적 마라토너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중앙포토]

실제로 억울한 경우도 있었다. 2011년 사격선수 강형철(34)의 경우다. 그는 감기 기운이 있어 병원에 가서 ‘국가대표 사격 선수다. 도핑에 걸리면 안 되니 잘 처방해달라’고 해서 처방전을 받았다. 그런데 그 감기약에서 금지약물 성분이 나와 1년2개월 자격정지를 당했다. 처방전을 준 의사가 WADA에 가서 “내 실수다”라고 증언했지만 소용없었다. ‘제2의 강형철’을 막기 위해 ‘치료목적 사용면책(TUE)’ 제도가 생겼다. 선수가 금지약물을 치료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허가를 받는 것이다.

‘도핑’ 하면 떠오르는 선수는 88 서울올림픽을 떠들썩하게 했던 육상의 벤 존슨(캐나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45·미국)이 더 악명 높다. 김 교수는 “최근의 도핑 적발 테크닉과 시스템은 거의 암스트롱 때문에 생겼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암스트롱은 다양한 종류의 약물을 상시 복용했다. 단백질 합성과 근육 성장을 돕는 테스토스테론, 세포 신진대사와 뼈 성장을 촉진하는 hGH, 통증을 완화하고 피로를 줄여주는 코티손, 근육에 산소를 원활하게 전달해주는 EPO 등. 적혈구가 증가된 상태에서 자신의 피를 뽑아 보관한 뒤 경기 직전에 수혈하는 ‘자가 수혈’도 단골 메뉴였다.

암스트롱은 도핑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썼다. 도핑 검사가 나올 때쯤이면 해외 경기를 핑계로 도망을 쳤고, 도핑 검사관이 오는지 감시하기도 했다. 약물 검사 직전에는 식염수를 투여해 적혈구 수치를 낮췄고, 의사로부터 허위 처방전을 받았다. 심지어 주사자국을 들키지 않기 위해 팔에 화장을 하기도 했다.

암스트롱은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들에게 도핑에 동참하라고 압력을 가하거나 협박했다. 그뿐만 아니라 EPO 주사기나 테스토스테론 패치를 동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을 암스트롱 혼자 했을 리는 만무하다. 김 교수는 “전문 의사를 포함한 커넥션이 있었다. 요즘은 도핑 관련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인물과 접촉하기만 해도 WADA의 요주의 대상이 된다”고 전했다.

암스트롱이 일으킨 불똥은 대한민국 배드민턴 스타 이용대(28)에게도 튀었다. 암스트롱이 하도 요리조리 빠져나가니까 WADA에서 특급 선수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소재지를 보고하지 않으면 도핑을 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용대는 ‘선수 소재지 보고’ 규정에 걸려 억울하게 1년 자격정지를 받았다. 나중에 대한배드민턴협회의 행정 착오라는 게 밝혀져 징계가 취소됐다.

KADA 본부는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북2문 쪽에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으로 2007년 법정법인이 됐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가 정보기관처럼 꽁꽁 숨어 있어 찾는데 애를 먹었다.

스포츠의학을 전공한 윤정원 교육홍보부 대리는 “지난해까지는 한 해 2500~3000건 정도를 처리했다. 올해는 야구·축구 등 프로스포츠 쪽 업무가 늘어나 더 바빠질 것 같다”고 말했다.

KADA에는 17명의 직원이 일하는데 이들이 ‘어떤 대회 어떤 종목의 선수를 대상으로 도핑 검사를 하겠다’고 결정하면 전국에 흩어져 있는 100여 명의 도핑검사관이 현장에 가서 소변이나 혈액을 채취한다. 도핑검사관은 간호사·약사·체육분야 종사자 등으로 구성됐는데 하루 일당 10만원 정도 받는다. 채취한 샘플은 우체국 택배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보낸다. 거기서 스펙트로미터라는 초정밀 측정기구를 사용해 검사한다. 도핑 검사는 WADA가 지정한 곳에서만 할 수 있고, 한국에서는 KIST가 유일한 검사 기관이다.

도핑검사관으로도 일했던 윤정원 대리는 검사 과정에서 난처한 경우도 많이 겪는다고 했다. “소변 채취도 엄격한 규정을 지켜야 한다. 검사관이 입회한 가운데 상·하의를 특정 부위까지 올리고 내린 상태에서 소변을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 선수들, 특히 어린 선수들은 ‘안 따라오시면 안 돼요?’,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요?’라며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 ‘특정 부위’를 너무 오래 쳐다보지 말라고 항의하는 선수도 있다. 그런데 외국 선수들은 소변을 받는 순간 ‘여길 봐야지 어딜 보느냐’며 확실하게 의사를 전달한다. 도핑에 대한 인식이나 교육의 차이 같다”고 말했다.


l “도핑 잡는 과정에서 신약·신기술 개발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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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출신 테니스 스타 마리아 샤라포바 역시 금지약물 복용 사실이 드러나면서 퇴출 위기에 몰렸다. 2014년 프랑스오픈 여자단식 결승에서 승리한 뒤 환호하고 있는 샤라포바 [뉴시스]

올해부터는 프로스포츠 도핑 검사도 KADA에서 전담해야 한다. 또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의 통합이 마무리되면 검사 대상자인 등록 선수가 지금의 몇 배로 늘어난다. 그런데 인력과 예산(연 30억원)은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KADA의 고민이 깊다.

윤정원 대리는 “도핑 방지 교육과 홍보에서 가장 강조하는 분야가 유·청소년 쪽이다. 어릴 때 도핑의 위험과 불법성을 깨달으면 성인이 돼서도 도핑을 멀리하게 된다. 가장 좋은 홍보 방법은 아이돌 스타를 섭외해 뮤직비디오나 CF를 찍어서 방영하는 것일 텐데 그건 우리 1년 예산을 털어도 안 될 것”이라며 웃었다.

도핑의 수법은 점점 다양하고 교묘해지고 있다. 요즘은 약물 복용뿐만 아니라 뇌파를 자극하는 ‘브레인 도핑’도 이슈가 되고 있다. 도핑이 교묘해지면 그걸 잡는 방법도 발전한다. 혐의가 있는 선수들의 검사 내용을 빅데이터로 관리하고 있다가 수치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는 순간 ‘불시에 덮치는’ 기법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엘리트 선수들의 일탈에서부터 시작된 도핑-반도핑 싸움이 기술 개발로 이어지고, 이게 신약이나 신기술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김한겸 교수는 “우리나라의 도핑 적발 수준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KIST가 벤 존슨의 도핑을 적발하자 전 세계 도핑 관련 전문가들이 깜짝 놀랐다. 우리의 높은 의료 수준을 바탕으로 도핑 적발의 신기술을 개발하면 세계에 수출할 수 있다. 또 뛰어난 체력과 경기력을 지닌 엘리트 선수들을 샘플로 한 각종 검사는 그 자체로 매우 가치가 높다. 이를 바탕으로 신약을 개발해 환자나 일반인들을 돕는다면 그게 바로 창조경제일 것”이라고 말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스포츠는 계속될 것이고, 스포츠가 있는 한 도핑과 반도핑의 숨바꼭질은 계속될 것이다. 도핑은 ‘공정성’이라는 스포츠의 존립 근거를 허무는 행위다. 또한 선수의 육체와 정신에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끼치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한다. 박태환을 보며 수영 선수를 꿈꾸던 아이들, 랜스 암스트롱 같은 사이클 선수가 되겠다던 아이들은 ‘영웅의 몰락’을 보며 영혼에 큰 상처를 입는다. 김한겸 교수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

“박태환 파문은 우리나라 도핑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세계적인 선수일수록 자기관리가 철저해야 한다. 도핑은 지도자와 선수에게 끊기 힘든 치명적 유혹이다. 끊임없는 교육을 통해 ‘제2의 박태환’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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