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전사 후배에게 “외제차 타자” 보험 사기 꼬드긴 선배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2012년 12월 특전사 소속 A씨는 전역한 선배 황모(26)씨와의 식사 자리에 나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급 외제차를 타고 나온 황씨는 양복도 아주 좋은 걸 입고 있었다. 군인 월급으로는 평생 꿈도 꾸기 어려운 거였다. A씨의 눈에 비친 황씨는 ‘전역 후 성공한 사업가’의 모습이었다.

기사 이미지

특전사 출신 브로커들이 보험 가입한 후배들에게 훈련 중 부상을 핑계로 치료를 받게 함. 이후 “영구후유장해 진단 받으려면 연습해야 한다”며 연기 지도.

황씨는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간단해”라며 입을 열었다. “보험을 여러 개 가입한 후 후유장해진단을 받으면 쉽게 목돈을 챙길 수 있다”는 거였다. “가입부터 진단서 발급까지 다 세팅돼 있어. 너도 살면서 외제차 한 번 타봐야 하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검거된 23명 중 16명이 특전사 출신
복무 중 영구장해 속여 보험금 탄 뒤
15~20% 수수료로 브로커들이 챙겨
진단 전 장해로 보이게 연습도 시켜
“허위진단서 의심 의사들도 곧 소환”

구미가 당긴 A씨는 2~3개월간 10개의 보험에 가입했다. 뒷일은 어렵지 않게 진행됐다. A씨는 황씨가 시키는 대로 “훈련 중 부상을 당했다”고 주장해 부대에서 공무상병인증서를 발급받고 병원 치료도 받았다. 군 제대 후 황씨 등 브로커들이 소개하는 병원을 찾아가 영구후유장해 진단서를 발급받아 보험금을 청구했다. A씨가 이런 방식으로 받은 보험금만 5000만원에 달했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군 복무 중 영구적인 장해를 입은 것처럼 속여 보험금을 타내게 한 뒤 수수료를 받은 혐의(상습사기 등)로 육군 특수전사령부 부대원 출신 황모(26·보험 모집인)씨와 브로커 21명을 검거했다고 18일 밝혔다. 총책인 황씨는 구속, 나머지 21명(16명이 특전사 예비역)은 불구속 입건됐다. 경찰은 또 황씨 등 13명으로부터 경찰 수사 무마 명목으로 2억7000여만원을 받은 혐의(변호사법 위반)로 황씨의 친척 이모(56)씨도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황씨 등은 2012년 12월부터 최근까지 4년에 걸쳐 후배 군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해왔다. 황씨도 처음에는 장해진단을 받아 1400만원의 보험금을 받은 전역군인이었다. 그는 보험금이 쉽게 지급된다는 것을 알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후배들을 상대로 보험 영업을 시작했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경기도 김포에 보험대리점을 차린 황씨는 후임들을 영업사원으로 끌어들여 조직적으로 일을 했다.

기사 이미지

의사가 문진하기 전에 피보험자의 무릎이나 발목을 잡아당겨 장해가 있는 것처럼 조작. 또는 사전에 의사와 결탁해 가짜 영구후유장해 진단서를 발급 받음.

황씨 등의 권유로 보험에 가입한 군인들은 디스크, 어깨나 발목 부상, 이명 등 각종 부상을 이유로 전역 후 브로커들과 연계된 병원의 의사를 통해 영구후유장해 진단서를 받았다. 이들은 받은 보험금의 15~20%를 황씨 등 모집인에게 수수료로 떼 줬다. 황씨는 4년간 5억원을 벌었다.

황씨 일당은 특수부대원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다가 보험회사에서 이를 이상하게 여기자 2014년 타깃을 육군 부사관과 장교로 확대했다. 경찰 조사 결과 허위 진단서로 보험금을 타낸 것으로 의심되는 전역자·현역 군인 등 피보험자는 531명이다.

군부대별로는 특전사 314명, 육군 189명, 해군 7명, 공군 4명, 기타 17명이다. 이들이 타 간 총 보험금은 179억여원이다. 특히 이들 중 보험을 5건 이상 가입하고 1000만원 이상의 보험금을 받은 피보험자가 470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이들 470명은 평균 8.7개의 보험에 가입했고 평균 3300만원의 보험금을 받았다”며 “2억1400만원을 타낸 피보험자도 있다”고 말했다. 수사팀은 또 영구후유장해로 보험금을 받아 놓고 전역 후 경찰·해경·소방대원으로 취업한 61명도 수사하고 있다.

경찰은 허위 진단서를 발급해준 것으로 의심되는 22개 병원 23명의 의사도 소환 조사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의사는 진단서 발급 비용 외에 건당 30만~50만원씩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 관계자는 “브로커들이 의사에게 진단받기 전에 장해로 보이게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며 “일부 의사는 X선 촬영도 하지 않고 문진만으로 진단서를 발급했다”고 설명했다.

◆영구후유장해=치료 후에도 원상 회복 가능성이 없는 영구적인 장해를 말한다. 디스크·골절·인대파열 등 각종 상해가 완치되지 않을 경우 의사의 진단에 따라 인정받을 수 있다.

박민제·채윤경 기자 pcha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