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 출퇴근, 사장님이 시켜도 안 되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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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부장 10분, 차장 20분, 과장급 이하는 30~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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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삼성전자가 ‘자율 출퇴근제’를 도입하자 직원들 사이엔 이런 말이 유행했다. 직급에 따라 그만큼 아침 잠을 더 잘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30대 그룹 중 16곳 유연근무제 도입
팀 업무 많아 개별 출퇴근 눈치보여
“상명하복 의사소통 체계 바뀌어야”
대한상의, 기업문화 개선 캠페인

자율 출퇴근제는 ‘주 5일간 매일 출근, 하루 최소 4시간 근무, 주당 40시간 근무’라는 세가지 원칙만 지키면 출퇴근 시간을 개인이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제도다. 러시아워를 피할 수 있고 상사가 나오기 전에 일찍 나올 필요도 없어 직원들은 반색했다. 삼성전자가 자율출퇴근제를 도입한 지 1년. 과연 얼마나 정착됐을까.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제도가 도입됐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실제 사용하는 직원이 거의 없다”며 “사실상 제도가 사문화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팀 업무가 많은데 혼자 튀게 근무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하급자는 거의 없다”며 “제도 도입의 취지와 현장의 정서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애플·구글·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정보기술(IT)기업들처럼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기업문화를 만들겠다며 3년간 준비 끝에 이 제도를 도입했다. 실제 삼성전자 측은 도입 당시 “수·목요일에 각각 12시간씩 일한 뒤 금요일 오전 4시간만 일하면 바로 해외여행을 떠나 월요일 오후에 출근할 수 있다”며 “여가 활용도가 높아지면 근무 집중도도 따라 높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기·삼성디스플레이·삼성SDI 등 전자 계열사들도 잇따라 제도 도입에 동참했다.

의욕적으로 도입한 당시와 달리 삼성전자는 현재 이용 현황조차 파악하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직무와 사업장에 따라 업무 형태가 달라 운용 여부는 자율에 맡길 뿐 현황 집계는 하지 않고 있다”며 “대체로 연구개발(R&D) 분야에서 활용도가 높고 일반 관리직에서는 활용도가 낮은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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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7월말 기준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기업은 30대 그룹 가운데 SK·LG·한화·효성·현대·KT 등 16곳이다. SK그룹은 2013년 SK㈜,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등 주력 계열사에서 이를 도입했다. LG그룹도 LG생활건강, LG이노텍 등이 유연근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한화그룹은 남녀 직원 구분 없이 육아기 출근시간 조정제를 희망자에 한해 실시하고 있고, 효성그룹에서는 IT 비즈니스 솔루션 계열사에서 시간제 및 선택적 일자리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제대로 정착된 경우는 일부에 그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착이 안되는 이유로 경영진의 의식 변화 부족을 먼저 꼽는다. 이상빈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최고 경영진이 농업적 근면성을 강조하고, 상명하복의 의사소통 체계, 개인보다 조직을 앞세우는 위계질서 등이 존재하는 한 자율 출퇴근제는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전재권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일과 가정을 함께 보살필 수 있고 휴가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기업에 우수 인재가 몰리고 기업 경쟁력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전 연구원은 “뿌리내리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업이 나서서 꾸준히 이용을 독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명무실한 자율출퇴근제를 포함해 기업문화 전반을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대한상의는 낡은 기업문화를 없애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대한상의는 다음달 1일 ‘기업문화와 기업경쟁력 컨퍼런스’를 열고 토크콘서트·실무포럼 등을 운영할 계획이다.

박태희·박성민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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