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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여론조사의 옥석을 가려야 할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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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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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얼마 전이다. 미국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일대일 대결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처음으로 앞섰다는 기사를 한 신문에서 읽었다. 일부 지상파 방송도 같은 소식을 전했다. 미국 여론조사회사인 라스무센을 인용한 뉴스다. 그러나 정작 미국의 주요 언론에서 해당 뉴스를 찾을 수 없었다. 뉴욕타임스와 NBC뉴스는 라스무센의 여론조사와 관련된 보도를 하지 않았다.

방법과 분석 따라 품질 천차만별
책임 있는 언론, 함부로 인용 안 해
정당도 부실 여론조사의 공범
민심 변화 보여주는 조사 필요

라스무센은 자동응답시스템(ARS) 조사를 주로 한다. 가끔 인터넷 조사를 섞기도 하지만 ARS가 주력인 조사회사다. ARS 조사의 문제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일단 응답률이 낮다는 문제가 있고, 조사에 참여하는 응답자가 편향적이라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주말에 집에서 전화를 받고, 기계를 상대로 정치 성향을 고백하는 응답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일지 생각해 보라. 라스무센은 2012년 미국 대선에서 밋 롬니 후보가 버락 오바마를 꺾고 대통령이 된다고 잘못 예측했던 전력이 있다. 2014년 중간선거에서도 공화당에 편향된 결과를 발표해 구설에 올랐다. 자료 기반 저널리즘을 선도하는 ‘파이브서티에이트’는 2014년 여론조사기관을 평가한 보고서를 내면서 라스무센에 C평점을 줬다. 결코 좋은 점수라 할 수 없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미국의 주요 언론사는 라스무센 조사 결과를 받아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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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요점을 즉시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여론조사라고 다 같은 조사가 아니다. 조사방법과 분석에 따라 품질이 천차만별이다. 연구와 투자를 아끼지 않고 고품질 조사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조사기관이 있는가 하면 의심스러운 방법론을 고집하는 곳도 있다. 응답률이 5%대인 조사 결과를 여기저기 뿌리는 조사회사가 있다. 선거철마다 ‘떴다방’처럼 생겨서 저렴한 비용으로 어떤 조사라도 해줄 수 있다고 말하고 다니기도 한다. 누군가 옥석을 가려야 한다.

둘째, 책임 있는 언론이라면 흥미로운 여론조사 결과라고 해서 아무 결과나 함부로 인용하지 않는다. 자료의 신뢰성을 검토해 걸러내는 게 언론의 일이 아니던가. 자료를 벼려서 정보로 가공하고, 정보에 기반해 이야기를 만드는 게 기자다. 언론이야말로 여론조사 자료의 품질을 평가하고 조사기관 중에서 옥석을 가리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여론조사 환경을 악화시키는 주범 중 하나가 바로 언론이라는 게 문제다. 조사의 품질을 고려하지 않고 싸구려 조사를 의뢰하는 곳 중 하나가 언론사다. 흥미로운 결과를 보면 조사회사의 능력과 신뢰성을 검토하지 않고 아무거나 인용한다. 조사 결과를 해석할 때도 무심하기 짝이 없다. 딱 일주일간 여론조사 방법론 특강을 듣고 쓰는 수준이다.

정당은 말하자면 공동정범이다. 정파에 유리한 조사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감수하겠다는 듯이 행동한다. 세상에 착신 전환을 이용한 응답자 선정으로 조사 과정을 왜곡하는 나라가 또 어디 있겠나 싶다. 그것도 정당 내 경선과 같이 민주적 정당성이 필수적인 과정에서 말이다.

20대 총선이 끝난 지 몇 주가 지났다. 유권자는 아직 여소야대라는 새로운 정국이 낯설다. 원 구성이 이루어지고 국회를 개원해야 실감이 날까. 적어도 언론만 보면 온갖 정치꾼이 종편 채널과 토론 프로그램에 등장해 선거 이후 정국을 예단하던 때와 다를 바 없다. 심지어 이젠 대통령선거 정국이란다.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될지, 각 예상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어떤지 떠들기 시작했다. 지난 총선 예측에 대한 반성도 없이, 제대로 된 여론조사 자료도 없이 다시 소란이다.

나는 역시 언론이 먼저 정신 차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련한 기자라면 안다. 누가 여론조사를 빙자해 여론몰이를 하고 있는지. 상식이 있는 기자라면 감을 잡는다. 그 가격으로 그렇게 조사하면 날림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양심 있는 기자라면 이미 느꼈을 것이다. 지난 총선 개표 과정을 보면서 민심이 이렇게 변한 줄 몰랐다고 고백하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민심 파악은 정치인에게 생존이지만 언론인에게는 의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누가 제대로 된 여론조사를 수행하는지 검증해봐야 한다. 단순한 후보 지지율 스냅샷을 얻기 위한 조사가 아닌 지지율 변화를 설명하는 조사를 하는 기관을 찾아봐야 한다. 조사 결과의 뉴스 가치도 중요하지만 방법론에 편향이 개입하지 않는지 먼저 검토해야 한다. 만약 제대로 된 조사 결과가 없다면 비용이 들더라도 언론사가 직접 여론조사를 설계하고 발주할 수 있어야 한다.

201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라스무센이 60회 여론조사를 하는 동안 뉴욕타임스는 CBS와 함께 단 두 차례 여론조사를 수행했다. 하지만 내용과 품질이 다르다. 정석대로 방법론을 적용하고, 수십 문항을 이용해 민심의 향방을 설명했다. 좋은 자료를 이용한 기사는 품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단순히 성·연령·지역을 구분해 후보 지지율을 따져보는 수준을 넘어설 수 있다. 후보 지지율에 대한 스냅샷을 넘어 민심 변화의 파노라마를 보여줄 수 있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