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정운 ‘창조의 본고장’ 바우하우스를 가다②] 두 번째 이야기: 소니-애플-바우하우스의 아주 희한한 연결고리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소니와 애플의 혁신적 디자인의 뿌리는 바우하우스… 모방과 편집, 재창조를 거치며 고유한 개성 만들어

기사 이미지

베를린 운터덴린덴 거리에서 바라본 브란덴부르크 성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불과 한 달 전, 동독의 당 서기장이었던 에리히 호네커는 이 거리에서 동독 건국 4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 같은 기념행사의 목적은 ‘기억을 통한 의미구성’이다. / 사진·윤광준

#1. 정말 ‘귀중한 것들’은 시간이 흘러야만 비로소 깨닫는다!

베끼고, 뒤틀고, 편집하라

지나야 비로소 깨닫는다. 다 지나버려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너무 안타깝지만 삶의 모든 경우가 그렇다. 내가 쓴 모든 책에 등장하는 ‘내 친구 귀현이’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가를 그가 느닷없이 세상을 떠난 후에 비로소 깨닫는 요즘이다.

너무나 건강하던 내 친구 귀현이가 간암말기 판정을 받았다고 연락이 온 것은 지난 2월 초였다. 이 원고의 취재를 위해 베를린과 바이마르를 정신 없이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모든 종합병원에서 치료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문자를 여행을 함께하던 윤광준에게 보여줄 때, 나는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멈추기 힘들었다. 그 후, 그가 세상을 떠난 지난 3월 21일, 그리고 그 큰 몸집이 한줌 재가 되어 작은 항아리에 담겨졌던 3월 23일까지 나는 정말 너무 많이 울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전라도 여수 앞바다 섬에 있는 작은 포구의 집을 살 생각이었다. 배가 많이 들어와야 20척 정도 들어오는 예쁜 포구다. 내 친구 귀현이는 작은 고깃배를 사기로 했다. 요트가 아니다. 실제 어부들이 타는 작은 고깃배다.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 겁 없이 달려드는 귀현이는 배의 선장이 되고, 나는 그 배에 개 한 마리를 태우고 매일 아침 고기잡이 나간다. 귀현이는 고기를 잡고, 나는 <노인과 바다>의 헤밍웨이처럼 배 한 귀퉁이에 앉아 ‘노인과 개’라는 새로운 작품을 쓴다.

고기가 잡히면 바로 카톡으로 사진을 올려 주문을 받고 그 자리에서 즉시 배송해주는 사업을 하기로 했다. ‘어부 김정운’이란 이름의 사업자등록도 하기로 했다. 나는 강연이나 방송에서 이 ‘어부 김정운’을 홍보하고, 귀현이는 고기를 잡아 보내주는 사업을 하며 늙어가기로 했다. 너무 즐겁고 설레는 노후 계획이었다. 죽기 이틀 전에도 우리는 이 사업 이야기를 했다. ‘바람처럼 살았던 귀현이’와 ‘완전 이기적으로 살았던 나’는 고기 택배사업으로 마누라들의 잔소리는 더 이상 안 들어도 될 거라며 킬킬댔다. 수혈하는 링거의 바늘을 꽂아주는 간호사의 느닷없이 예쁜 얼굴을 보고는 서로 이심전심으로 눈짓하며 히죽거리기도 했다.

귀현이는 ‘신어부사시사(新漁父四時詞)’라는 제목의 사진 집을 낼 거라고도 했다. 황달로 샛노래진 그의 눈이 그렇게 반짝거릴 수 없었다. 그가 간암말기라는 의사들의 진단은 순전히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난 오진이라고 믿었다. 심해야 간경화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지하게 비싼 장비들로 무장한 의사들의 진단은 옳았다. 내 친구 귀현이는 아주 급하게 세상을 떠났다. 바람처럼 살더니 바람처럼 떠났다. 계속 살아야 하는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원고를 쓴다. 자꾸 눈물이 나도 원고마감은 지켜야 한다.

삶은 존재의 의미를 끝없이 재확인하는 과정

기사 이미지

독일 라이프치히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매들러 파사주 입구와 내부. 4층에 내부 길이가 142m에 달하는 매들러 파사주는 1914년에 지어졌다. 20세기 초, 유럽도시들에는 이 같은 아케이드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날씨와 상관없이 365일 쇼핑이 가능했던 아케이드는 지금까지 없었던 독특한 자본주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발터 벤야민은 아케이드에서 일어나는 문화현상을 ‘제의종교’라고 칭했다. / 사진·윤광준

시간이 지나 깨닫는 것을 ‘기억’이라고 한다. 기억은 의미다. 기억한다는 인지적 행위 자체는 의미구성을 전제로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매일같이 경험하는 그 수많은 사건 중에서 특별한 것들만 기억하는 이유다. 여러 친구 중에서 귀현이와 함께한 기억들이 내게 그토록 가슴 저린 것은 그와 40년 가까이 만들어왔던 의미들 때문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지만, 내 삶의 의미는 지속되어야 한다. 의미 없는 삶은 불가능한 까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들을 추도하며 의미를 재구성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를 ‘리추얼(ritual)’이라고 한다.

리추얼은 인류가 ‘자의식(self-consciousness)’이라는 것을 가질 때부터 존재한다. 기억이 없다면 ‘내가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미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리추얼이 있어야 불안하지 않다. 존재의 의미가 확인될 때, 걱정과 고통을 견뎌낼 수 있다. 집단도 마찬가지다. 리추얼이 발달한 집단일수록 잘 뭉친다. ‘함께 있다’는 의미를 끊임없이 부여받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힘들수록 리추얼은 반복된다. 집단 리추얼의 기초는 역사적 기억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단기억(collective remembering)’으로서 역사학은 ‘의미구성학(意味構成學)’이라 해야 옳다. 흩어진 기억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편집 해내기 때문이다.

의미구성의 과정이 가장 세련되게 구성된 리추얼은 종교의례다. 유교적 전통에 따른 우리나라 명절의 차례, 목탁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불교의 불공, 온갖 상징적 행위로 가득한 천주교의 미사, 설교자의 메시지가 강조되는 기독교의 예배 등과 같은 종교적 리추얼은 다양한 상징 장치를 동원하여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억을 재구성하며 의미를 생산한다. 그래서 종교를 가진 사람이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오래 살며 행복하다고 느낀다. 살아야 하는 의미를 매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가 생성되지 않고 형식만 남아있다면 더 이상 리추얼이 아니다. 습관일 따름이다. 그래서 젊은 며느리들에게 전통 명절은 그저 고달프기만 한 것이다.

#2. 스티브 잡스의 애플은 ‘제의종교(Kultreligion)’다!

기사 이미지

스티브 잡스의 성스러운 예복. 잡스의 검은색 터틀넥 티셔츠와 청바지는 애플이라는 자본주의적 제의종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의상이었다. 직원들에게 애플 유니폼을 입히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잡스는 스스로 ‘잡스 유니폼’을 만들어 입는다. / 사진·중앙포토

오늘날, 고전적인 형태의 종교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큰 감동을 주지 않는다. 전통사회에서 의미부여의 기능을 했던 각종 리추얼은 이제 부담스럽고 귀찮을 따름이다. 전통적 모임을 유지시켜줬던 집단리추얼도 이제 한없이 ‘촌스럽게’ 느껴진다. 이제 기존의 리추얼이 가지는 부담을 덜어줄 새로운 리추얼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새로운 리추얼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시대변화에 따른 새로운 욕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리추얼을 드디어 만들어냈다. 쇼핑이다. 종교적 리추얼이 동원된 상품의 대량생산과 집단적 소비에 숨겨져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심리학적 본질을 최초로 간파한 이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다. 벤야민에게 자본주의는 그저 상품과 화폐 교환의 특별한 형식이 아니었다. ‘종교적 현상’이었다.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를 그는 ‘제의종교(Kultreligion)’라고 불렀다. ‘쿨트(Kult)’는 리추얼과 같은 상징형식의 예배가 극대화된 형태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의 모든 상품판매, 구매 행위는 리추얼을 동반한다.

20세기 초, 유럽의 대도시 곳곳에 나타났던 백화점, 아케이드(파사주)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건물은 중세의 성당과 같은 엄숙함과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아울러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장식이 유리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쇼윈도와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조명은 진열된 상품에 대한 신비로운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아케이드에 들어온 이상,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상품에 대한 환상은 그 상품의 실제 ‘사용가치’와는 무관하다.

기존 종교와 구별되는 자본주의적 제의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제의를 위한 기념일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다. 날짜를 정해 신을 예배하는 기존 종교와는 달리 ‘물신(物神)’을 예배하는 종교적 제의는 매일 이뤄진다. 사람들은 매일 아케이드의 좁은 골목을 몰려다니며 진열된 상품을 찬양하고 예배한다. 자본주의적 제의종교는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죄를 짓게 한다고 벤야민은 주장한다. 바로 여기에 벤야민의 탁월함이 있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분열로 야기되는 소외현상을 자본주의적 모순의 핵심으로 지적한다.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그의 경제학적 가치론이 심리학적 통찰을 포함하는 아주 드문 지점이다. 그러나 벤야민의 제의종교론은 마르크스의 소외론에서 한 발 더 나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운명은 단순히 생산물, 생산과정,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각종 제의를 통해 사람들을 끊임없이 죄짓게 하며, 궁극적으로 신마저 죄를 짓게 한다고 벤야민은 주장한다. 그의 비관론은 이어진다.

“죄를 씻을 줄 모르는 엄청난 죄의식은 제의를 찾아 그 제의 속에서 그 죄를 씻기보다 오히려 죄를 보편화하려고 하며, 의식(意識)에 그 죄를 두들겨 박고 결국에는 무엇보다 신 자신을 이 죄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신 자신도 속죄에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 이 자본주의라는 종교운동의 본질은 종말까지 견디기, 궁극적으로 신이 완전히 죄를 짓게 되는 순간까지, 세계 전체가 절망의 상태에 도달할 때가지 견디기이다. 그것은 이러한 절망의 상태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가 존재의 개혁이 아니라 존재의 붕괴인 점에 바로 자본주의가 지닌 역사적으로 전대미문의 요소가 있다.”

벤야민의 비관론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그의 통찰은 격한 감동까지 느끼게 한다. 그의 시대가 자본주의가 꽃 피우기 시작하던 20세기 초반이었음을 생각해보라. 벤야민의 ‘종교적 외피를 입은 자본주의’ 분석은 1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한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은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제의종교에 가장 잘 들어맞는 사례다. 창조적 혁신가로 추앙받는 스티브 잡스는 벤야민의 관점으로 보자면 자본주의적 제의종교의 ‘교주’다. 그를 추종하는 전 세계의 ‘애플빠’는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과 유사한 행태를 보인다.

신조차 타락하게 하는 자본의 달콤한 유혹

실제로 잡스처럼 종교적 제의에 충실했던 기업가는 없다. 그가 시도했던 애플의 신제품 발표회를 기억해보라. 환호로 시작해서 기쁨으로 끝나는 신제품 발표회는 시작부터 끝까지 종교적 제의였다. 전 세계 사람은 TV, 인터넷으로 새로운 제품을 예배했다. 이미 숱한 아이폰, 아이팟이 집 곳곳에 쳐박혀 있어도 새로운 버전의 제품이 나오면 무조건 또 구매했다. 필요해서 구매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플의 신제품을 손에 넣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은 애플의 새 제품을 손에 넣기 위해 매장 앞에서 며칠이고 줄 서서 기다렸다. 잡스의 신제품 발표회는 무의식까지 지배하는 구매의 리추얼이었다. 잡스의 터틀넥과 청바지는 예배를 주재(主宰)하는 성스러운 예복이었다. 제의종교에 어울리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여기서 이야기는 다시 소니와 애플의 관계로 돌아간다. 스티브 잡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청바지와 검은 터틀넥은 잡스의 ‘소니 흉내내기’였다. 1980년대 초반, 잡스는 일본의 소니를 방문했다. 똑같은 옷을 입고 일하는 소니 직원들의 모습을 흉내 내고 싶었던 잡스는 소니의 유니폼을 디자인했던 이세이 미야케에게 애플 유니폼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미국으로 돌아온 잡스는 직원들에게 자랑스럽게 소니 스타일의 나일론 조끼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건 직원들의 야유였다.

애플 유니폼의 꿈을 접어야 했던 스티브 잡스는 ‘잡스 유니폼’이라도 만들기로 결심했다. ‘블랙 터틀넥, 리바이스 501청바지, 뉴밸런스 회색 운동화’, 그가 생각해낸 ‘잡스 유니폼’이었다. 그는 다시 이세이 미야케에게 블랙 터틀넥 수백 장을 주문해서 옷장 가득히 채워 넣는다. 21세기를 대표하는 자본주의적 제의종교의 교주에 걸맞은 선택이었다. 잡스의 애플이 소니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같은 제의종교적 요소 때문이다. 소니의 디자인은 뛰어났지만 상품에 어울리는 리추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잡스는 달랐다. 대중들 앞에서의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사이비종교의 교주처럼 철저하게 계산된 것들이었다. 애플의 신제품 발표회는 잘 짜인 종교행사였다. 스티브 잡스가 일으킨 21세기 자본주의 혁명의 본질은 바로 이 같은 제의종교적 형태에 있다. 발터 벤야민의 자본주의 분석과 예언이 100년 후 제대로 이뤄진 것이다.

#3. 베를린에는 ‘소니센터(Sony Center)’가 있다

기사 이미지

베를린의 소니센터의 화려한 천정. 7개의 건물이 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소니센터는 통독 후 베를린으로의 수도이전을 기념해 지어졌다. 베를린 한복판에 세워진 소니 건물은 당시 한국유학생의 ‘민족적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준 건물이었다. 지금은 한국의 국민연금이 소유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독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날짜는 1989년 11월 9일이다. 그리고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된 날짜는 1990년 10월 3일이다. 그 기간에 나는 베를린에 있었다. 독일의 모든 통일과정을 내 눈으로 직접 경험했다는 이야기다. 돌이켜보니 당시의 하루하루는 어마어마한 역사적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 엄청난 사건들의 역사적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역사적 사건 또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는다.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다.

통일 후, 독일의회는 아주 중요한 안건을 처리해야 했다. 통일된 독일의 수도를 어디로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1991년 6월 독일의회는 근소한 차이로 본을 포기하고 베를린을 통일된 독일의 수도로 결정했다. 의회가 결정하자, 베를린의 변화는 급작스러웠다. 가장 큰 변화는 그동안 서베를린 외곽의 버려진 곳이었던 베를린 포츠다머 플라츠(Potsdamer Platz)에서 시작되었다. 새로운 건물들이 무섭게 들어서기 시작했다. 10년쯤 지나자 포츠다머 플라츠는 그 옛날 모습을 누구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그곳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은 소니센터다.

소니센터의 일부는 학생 기숙사를 헐고 지어졌다. 베를린의 학생 기숙사 중에서 비교적 넓고, 월세 또한 저렴한 곳이었기에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수년은 대기를 해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나 또한 몇 년째 그곳의 대기자 명단에 있었다. 바로 그 기숙사를 헐고 엄청난 규모의 세련된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건물이 거의 완공되자, 건물 한가운데 높은 사각기둥이 세워지고 ‘Sony’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쇼핑몰과 영화관, 호텔과 카지노가 화려하게 들어선 그곳이 일본의 소니가 투자해서 만든 ‘소니센터’라는 것을 알게 된 한국 유학생들은 허탈해 했다.

일본은 통일된 독일의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 이 엄청난 규모의 빌딩을 짓는데, 우리나라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답함이었다. 당시 비자를 연장할 때도 대한민국 국적자들은 제3세계 출신 사람들이 하염없이 기다리는 낡은 건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일본 국적자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선진국들에서 온 이들과 함께, 불과 몇분 만에 비자를 받게 되어 있는 세련된 건물로 안내됐다. 비자를 연장할 때마다, 똑같이 ‘노랗게’ 생겼는데 깨끗하고 세련된 옆 건물로 향하는 일본 유학생들을 보며 얼마나 서글펐는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 통일된 독일의 새로운 수도 베를린에 세워지는 가장 현대적인 건축물이 일본 소니의 소유라는 사실은 한국 유학생들을 다시 한 번 좌절케 한 것이다.

이제 이 소니센터의 실소유주는 한국의 국민연금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없이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소니로부터 대한민국의 국민연금이 2010년 인수했다. 한국에서는 국민연금의 베를린 소니센터 인수가 실속 없는 투자라고 비판이 많았지만, 베를린 유학생이었던 내겐 그렇게 통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과 서구에서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이제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그들에게 한국은 더 이상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특징 없는 나라가 아니다.

사실 베를린 한가운데 소니센터가 설립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70~80년대 소니의 비약적 성장은 독일의 전자회사 ‘베가(Wega)’를 인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베가는 1923년 슈트트가르트에서 시작된 라디오 생산업체였다. 한때 브라운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일을 대표하는 전자회사로 성장했지만, 1975년 일본 소니가 인수했다. 소니에 인수될 당시 베가는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했다. 현대적이고 진취적인 베가의 전자제품은 세계의 모든 디자인상을 휩쓸었다.

소니는 베가와 합병을 통해 베가라는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세련된 이미지를 소니에 입히고자 했다. 소니는 ‘베가’라는 브랜드 이름을 2005년까지 사용했다. 소니의 베가 인수는 소니 디자인의 질적 전환을 야기했다.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촌스럽기 그지없던 소니의 제품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거듭났다. 소니의 TV, 워크맨과 같은 휴대용 카세트기기, 오디오 등의 새로운 디자인은 당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유가 있었다. 베가를 인수하며 베가의 디자인을 책임지고 있었던 독일의 디자이너 하르트무트 에슬링거(Hartmut Esslinger)와 공동작업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브라운에 디터 람스(Dieter Rams)가 있었다면, 이에 맞서는 베가에는 젊고 야심 찬 에슬링거가 있었다. 에슬링거는 ‘단순함이 최고’라는 원칙에 따라 소니의 디자인을 새롭게 기획했고, 이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국제양식(international style)’이라고 불렀다. ‘국제양식’이란 바우하우스의 교장이었던 발터 그로피우스가 자신의 건축 설계방식을 일컬어 사용했던 용어다. 에슬링거는 그로피우스의 디자인 철학을 소니에 심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잡스의 애플로 돌아가보자. 잡스가 그렇게 흉내 내고 싶어했던 독일 가전회사 브라운의 디자인은 대부분 수석 디자이너 디터 람스의 작품이다. 1955년에 입사해 1998년 은퇴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브라운 제품의 디자인을 책임졌던 디터 람스는 독일을 대표하는 산업디자이너다. 애플의 디자인을 책임지고 있는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가 디터 람스의 디자인을 대놓고 흉내 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조금 더 파고 들어가보면 애플 디자인의 ‘편집과정’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특히 소니와의 관계가 그렇다.

우선, 디터 람스의 산업디자인은 ‘울름조형대학(Hochschule für Gestaltung in Ulm)’의 교수였던 ‘한스 구겔로트(Hans Gugelot)’의 디자인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초기 브라운 제품의 대부분은 울름조형대학과의 산학협동을 통해 생산되었다. 울름조형대학은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졸업생인 막스 빌(Max Bill)이 독일에서 사라진 바우하우스의 전통을 잇기 위해 설립한 학교다. 이렇게 ‘애플’-‘조너선 아이브’-‘디터람스’-‘한스 구겔로트’-‘브라운’-‘울름조형대학’-‘바우하우스’의 연결고리가 생겨난다.

#4. 소니와 애플 디자인의 뿌리는 결국 바우하우스였다!

기사 이미지

애플의 ‘아이팟(iPod)’ 1세대(오른쪽)와 브라운의 포켓라디오 ‘T3’. 이렇게 애플은 브라운의 디자인을 ‘표절’, 혹은 ‘편집’했다. 삼성은 그런 애플의 디자인을 더욱 촌스럽게 ‘표절’, 혹은 ‘편집’했다. 애플과 삼성의 차이는 바로 그 정도다. 그러나 그 차이에 숨겨진 숱한 문화사를 읽어내야 한다. 그래야 애플이 극복된다. / 사진제공·김정운

일반적으로 애플의 바우하우스식 디자인 철학을 조너선 아이브가 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 아이브가 잡스와 같이 일하기 시작한 것은 잡스가 애플에 복귀했던 1997년 이후의 일이다. 물론 아이브가 애플에 입사하는 것은 1992년이다. 그러나 당시 잡스는 애플에 있지 않았다. 그보다 7년 전인 1985년, 자신이 만든 애플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잡스가 없는 애플에서 조너선 아이브는 그저 월급쟁이 디자이너에 불과했다.

잡스가 브라운의 디자인을 공개적으로 처음 언급한 것은 1983년의 일이다. 조너선 아이브가 애플의 디자인에 관여하기 훨씬 전에 잡스는 브라운의 디자인을 ‘표절’, 혹은 ‘편집’하고자 했다. 그해 잡스는 ‘브라운의 디터 람스’ 같은 디자이너를 뽑는 콘테스트를 개최한다. 이때 우승한 사람이 바로 앞서 설명한 독일의 하르트무트 에슬링거였다. 잡스가 한물간 디자인이라고 폄하했던 소니의 디자인을 책임졌던 사람이 바로 하르트무트 에슬링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보면 소니에 대한 잡스의 태도는 참으로 이중적이다. 에슬링거의 회사 ‘프록 디자인(frog design)’은 그해 바로 잡스와 계약을 맺고 애플 컴퓨터의 전형처럼 여겨지는 날렵한 스타일의 ‘애플IIc’와 ‘매킨토시 SE’를 세상에 선보인다. 사람들은 그때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스타일의 컴퓨터인 ‘매킨토시 SE’에 열광했다.

기사 이미지

하르트무트 에슬링거가 디자인한 독일 베가(Wega)의 TV와 소니가 베가를 인수한 후에 생산한 소니의 트리니트론 TV. 20세기 후반 소니가 세계의 전자업계를 호령한 것은 일본의 ‘축소지향적’ 기술력에 독일의 단순한 디자인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 사진·중앙포토

잡스는 에슬링거에게 디자인을 맡기며 ‘소니가 컴퓨터를 만든다는 가정 하에 디자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니까 잡스가 1983년 콘퍼런스에서 소니 디자인은 이제 한물갔다고 이야기했던 것은 순전히 ‘개뻥’이었던 거다. 잡스가 ‘소니’와 ‘브라운’을 구분한 것은 소니의 디자인을 깎아내려 애플의 디자인을 주목받게 하려는 의도였을 확률이 높다. 아이폰의 프로토타입에 ‘소니 스타일’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소니의 디자인을 흉내 내려고 했던 일이 2006년도의 일인 걸 보면, 잡스의 소니에 대한 ‘애증’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것 같다.

깔끔하게 각지고, 매력적인 검은색의 소니를 디자인했던 에슬링거가 애플 컴퓨터를 디자인하면서 새로운 원칙을 내세운다. 이른바 ‘백설공주 디자인 언어(Snow White design language)’다. 제품 전체를 흰색으로 하고, 컴퓨터 홈들을 얇고 긴 형태로 파며 모서리를 부드럽고 간결하게 만드는 이 디자인 원칙을 에슬링거는 백설공주 디자인 언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원칙은 그 후 에슬링거가 디자인한 모든 애플 컴퓨터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백설공주 디자인 언어 또한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디터 람스가 1963년 디자인한 브라운의 대표적 오디오 기기인 ‘SK55’의 별명이 바로 ‘백설공주의 관(Snow White’s Coffin)’이었다. 이름만이 아니다.

기사 이미지

디터 람스가 디자인 한 전설의 브라운 SK55, 일명 ‘백설공주의 관’과 하르트무트 에슬링거가 ‘백설공주 디자인 언어’에 따라 설계한 ‘맥킨토시SE’. 기본 색상인 흰색이 주는 깔끔한 느낌과, 길고 잘게 판 홈이 주는 이미지가 닮아있다. / 사진제공·김정운

에슬링거가 관여한 애플 컴퓨터와 디터 람스의 오디오 기기들의 디자인적 유사성은 사진만 슬쩍 비교해봐도 바로 분명해진다. 에슬링거는 바우하우스에서 브라운으로 이어지는 독일 디자인의 전통을 미국식으로 살짝 비틀었을 뿐이다. 아직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오늘날 이런 식으로 하면 바로 ‘표절’이라고 욕먹고 매장된다. 에슬링거는 폼 잡으며 ‘형태는 감정을 따른다(Form Follows Emotion)’는 디자인 철학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아주 오래된 바우하우스의 슬로건인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의 패러디에 불과하다. 에슬링거는 선배 디터 람스의 디자인을 모방하며 소니와 애플의 디자인을 만들었던 것이다. 산업디자인의 혁명으로 여겨지는 애플의 디자인은 이런 식의 베끼고, 뒤틀린 편집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제 ‘애플-브라운-디터 람스-한스 구겔로트-울름조형대학-바우하우스’의 연결고리에 에슬링거의 ‘베가-소니’의 연결고리까지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애플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구닥다리 바우하우스’에 관심 가져야 할 여러 가지 이유 중에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21세기 천재’ 스티브 잡스는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이었던 ‘20세기 천재’ 그 로피우스에 비하면 아주 어수선한 비즈니스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창조학교인 ‘바우하우스’에 관한 엄청난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나도 매우 궁금하다. 독일 책방에서 구입해서 보냈던 ‘어마 무시한’ 책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김정운 -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문화심리학(박사)을 전공했다. 명지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교수를 사임한 후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학에서 일본화를 전공, 2015년 수료했다. 현재 전남 여수에 머물며 그림과 저작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에디톨로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등이 있다. <애무> <보다의 심리학>을 번역했다.

기사 이미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