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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김환영의 종교 이야기 ① 종교와 웃음] 예수님과 부처님은 유머·조크의 ‘달인’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최근 ‘성(聖) 속의 웃음’ 등 연구하는 학자들 늘면서 웃음이 종교의 ‘핵심’이라는 주장도 제기돼… 과격 이슬람주의와 혼동하기 쉽지만 이슬람 자체는 평화와 웃음의 종교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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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종교와 웃음의 관계를 연구하는 종교학자·종교사회학자들이 늘면서 웃음이 종교의 핵심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열린 동자승 단기출가 및 수계식에 참가한 유치원생들이 환히 웃고 있다[중앙포토]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이 종교의 종언을 예상했다. 신앙인은 얼핏 수가 줄어드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늘고 있다. 미국·유럽 등지에선 줄었다지만 세계 다른 지역에서는 새로운 신자들이 증가한다. 또 기성 종교의 신자 수는 줄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이 영성 세계의 문을 두드린다. 또 무신론자가 많아지고 있지만 그들은 신앙인보다도 더욱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탈근대의 시대에 전근대·근대의 요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혼재한다. 전근대·근대·탈근대가 부딪히는 현장에 종교가 있다. 종교의 여러 가지 측면을 두루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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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을 4일 앞둔 3월 23일 대전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에서 원목팀 수녀들이 정성스럽게 꾸민 달걀을 바구니에 옮겨 담고 있다.[중앙포토]

불경이든 그리스도교 성경이든 천도교의 동경대전·용담유사든, 원불교의 정전·대종경이든 모든 경전은 우리를 다양한 관점과 해석의 세계로 초대한다. 예컨대 논어에 나오는 “내게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스스로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 사이에 시집가진 않았지?”

예컨대 공자님이 ‘나도 친구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외로운 심정을 토로한 문장일 수 있다. 그 벗은 내가 불러서 오는 벗이거나 다른 일을 보러 오는 김에 나를 찾는 벗이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 스스로 오는 벗이다. 내가 아무리 싫은 기색을 보여도 나를 너무나 좋아하는 벗인지도 모른다.

공자님은 제자는 많았으나 친구는 별로 없었다. 또 ‘외톨이’였던 공자님은 친구가 있다면 먼 곳에 있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가까운 곳에 있으면 자주 보게 된다. 자주 왕래하며 ‘뭉치다’ 보면 공부에 방해가 된다. 공자가 인생을 바친 목표에 친교는 차질을 빚게 만들 수 있다.

공자님뿐만 아니라 예수님·부처님 등 다른 성현도 친구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세계 주요 종교의 경전을 보면 성현과 제자들이 나눈 대화가 중심을 이룬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그 의미에 대해 제자가 스승에게 질문한다. 그러면 스승은 명쾌한 대답으로 제자들이 찍소리 못하게 ‘제압’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다. 스승은 근엄한 존재다. 세계적인 종교의 교조는 존경을 넘어 경외의 대상이다. 교리가 확정돼 공식화 된 다음에는, 함부로 하는 해석이 도그마 옹호 성향 신자의 저항을 부를 수 있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유머·조크의 달인’이었다는 학계의 주장이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를 느낄 수 있다. 국어사전을 펼쳐보자. 우스개·익살·해학으로 순화할 수 있는 유머(humor)는 “남을 웃기는 말이나 행동”이다. ‘농담·우스개’로 순화할 수 있는 조크(joke)는 “실없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나 익살”이다. 성현들이 ‘실없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인가? 당연한 의문이다.


l 경전 대하는 ‘심각한’ 태도도 유머 놓치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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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카이로 대학 앞 거리에서 다채로운 색깔의 히잡을 쓴 여대생들이 밝은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다.[중앙포토]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순교자를 배출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영국 성직자·작가 찰스 케일럽 콜턴(1780~1832)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종교를 위해 언쟁을 벌이고, 글을 쓰고, 싸우고, 죽기까지 하지만 종교를 위해 ‘살지는’ 않는다.” 결사를 다짐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따르는 그는 ‘유머·조크의 달인’이었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분노할지 모른다.

움베르토 에코(1932~2016)가 지은 <장미의 이름>은 ‘수도사들이 큰소리로 웃으면 안 된다’는 견해 때문에 발생한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지만 21세기를 중세처럼 사는 사람도 있다. 그게 꼭 나쁜 것은 아니며 그들에겐 그렇게 살 권리가 있다. 무함마드를 희화화(戱畵化)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참극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한번쯤은 웃음과 종교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일상생활에서 웃음을 빼면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을 것이다. 옛말에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웃는 집에 복이 있다”고 했다. 영어문화권에서는 “웃음은 최고의 명약이다(Laughter is the best medicine)”라고 한다. 웃음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대다수 언어에서 mother-mom, mutti-mutter, mère-maman, 어머니-엄마 등 ‘ㅁ·m’ 소리가 들어간다. 하지만 ‘하하(ha ha)’는 거의 모든 언어에서 웃음소리를 표기하는 단어다.

하지만 웃음은 왠지 속(俗)에만 속할 뿐 성(聖)과는 무관한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모든 종교문화권에는 종교생활을 둘러싼 우스갯소리가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예배 시간에는 왜 조용해야 하죠”라고 묻자 한 어린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자고 있으니까요.” 재미있는 실화도 있다. 교황 요한 23세(1958~63 재위)에게 “교황 성하, 바티칸에서는 몇 명이나 일을 합니까”라고 묻자 교황이 대답했다. “아, 그들 중 약 반 정도는 일을 할 겁니다.”

최근 성(聖) 속의 웃음, 종교와 웃음의 관계를 연구하는 종교학자·종교사회학자들이 늘고 있다. 웃음이 종교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종교문화 환경 속에서 생성되는 우스갯소리도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그들은 일차적으로 경전 자체에서 웃음을 발견한다. 그들의 논리는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유머는 강력한 설득의 도구다. 성현들은 대중에게 가르침을 설파할 때 조크·유머를 적절히 구사했다.

하지만 불경이나 성경을 열심히 읽은 신자도 경전에서 조크·유머를 읽고 웃었던 기억은 잘 나지 않을 것이다. 학자들은 경전을 대하는 우리의 ‘심각한’ 태도가 유머를 놓치게 한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은 또 시대의 문제와 언어, 특히 번역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성현들의 시대와 오늘 사이에는 수천 년의 간격이 있다. 몇 년 만에도 바뀌는 게 ‘웃음 코드’다. 전문가가 아닌 현대인이 성현 시대의 웃음 코드나 사회적 맥락을 알기 힘들다. 우리가 읽는 그리스도교의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문자화된 아람어 구어를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영어 성경이건 중국어 성경이건 메시지는 같다. 하지만 느낌은 다르다. 유머는 번역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원전의 언어 자체가 유머 친화적이 아닌 경우도 있다. 부처님의 말을 최초로 기록한 팔리어는 표현이 엄숙한 언어다.

우리말을 외국어로 옮길 때도 마찬가지다.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건 말건.” “남이야 뒷간에서 낚시질을 하건 말건.” “남이야 지게 지고 제사를 지내건 말건.” 이 속담들은 “남이야 무슨 짓을 하건 상관할 필요가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뜻은 외국어로 전달할 수 있겠지만, 이들 속담에 담긴 유머까지 옮기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l 웃음보다는 미소 유발하는 불교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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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잠실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 열린 4대 종단(개신교, 불교, 가톨릭, 원불교) 축구대회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중앙포토]

상대적으로 웃음 친화적인 종교와 그렇지 않은 종교가 있다. 같은 종교 내에서도 교단·교파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선불교 전통에는 선승들의 일화에서 유머가 흔히 발견된다. 그리스도교의 경우에는 오순절 교회나 흑인 교회가 청교도적인 교회보다 웃음과 친하다. 웃음만 따지면 유대교가 1등이다. 탈무드에는 조크·유머가 많다. 미국 코미디언의 80%가 유대인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이 ‘잘나가는’ 이유는 혹시 웃음이 넘치는 종교 문화 덕분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티베트 불교 신자들도 잘 웃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를 묻자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은 웃을 때 새로운 생각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쉬워진다.” 티베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만약 두 명의 철학자가 의견이 일치한다면, 둘 중 하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만약 두 명의 성자가 의견이 불일치한다면, 둘 중 하나는 성자가 아니다.” 티베트 불교를 비롯해 불교는 얼굴보다는 ‘머리’로 웃게 한다.

불교의 유머는 웃음보다는 미소(微笑)를 유발한다. 웃다는 “기쁘거나 만족스럽거나 우스울 때 얼굴을 활짝 펴거나 소리를 내다”를 뜻하다. 미소는 “소리 없이 빙긋이 웃음”이다. ‘laugh’와 ‘smile’의 차이다.

염화미소(拈華微笑)가 대표적이다. 염화미소에 대해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다. “말로 통하지 아니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일. 석가모니가 영산회(靈山會)에서 연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보이자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 지으므로 그에게 불교의 진리를 주었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다.”

부처님은 생로병사(生老病死) 즉 “사람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했다. 생로병사는 웃음을 사라지게 하는 모두 엄중한 문제다.

하지만 부처님 또한 유머를 썼다. ‘십사무기(十四無記: 붓다가 대답하지 않고 침묵한 열네 가지 무의미한 질문)’와 가장 밀접한 <전유경(箭?經)>에 좋은 사례가 나온다. 이런 내용이다.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았다. 화살을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화살을 맞은 사람은 아직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다는 것이다. 화살을 쏜 사람이 성과 이름은 뭔지, 귀족인지 사제인지 상인인지 노동자인지, 키가 큰지 보통인지 작은지, 피부색은 어떤지, 시골 사람인지 도시 사람인지…. 그는 잘못하면 곧 죽을 처지였지만 활의 재질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활을 뽕나무로 만들었는지 대나무로 만들었는지, 화살깃이 매 털인지 독수리 털인지 닭 털인지…. 어쩌면 영원히 결판나지 않을,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고심하지 말고 ‘독화살’을 뽑아내고 불법(佛法)을 따르라는 이야기다.

이 비유는 우리나라 70년대 고전 코미디와도 통한다. 귀한 자식이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을 ‘김수한무 거북이와두루미 삼천갑자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캉 무드셀라 구름이 허리케인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바둑이는 돌돌이’로 지었는데 우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지 않고 이름 전체를 부르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 불경과 메시지가 같다. 우선 ‘목숨’을 살려야 한다.

학자들은 부처님이 세련되고 절묘한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 말장난(pun)을 구사했다고 분석한다. 브라만(Brahman: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승려 계급)의 믿음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 또한 웃음을 자아내는 반어법·과장법을 사용하면서 기득권층을 비판했다.(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람어 자체가 과장법을 많이 쓴다) 다음과 같은 경우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마태복음 19:24) 어느 시대나 부자는 그리 인기가 없다. 이 말을 들은 청중은 속이 다 시원했을지 모른다.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주어라.”(마태복음 5:40)도 박장대소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겉옷·속옷을 다 주고 나면 알몸이 되기 때문이다.


l 반어법·과장법 통해 기득권층 비판한 예수님


예수님 스스로는 어땠을까. 성경에 예수님이 울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만 웃었다는 말은 없다. 실제로 전혀 웃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예수님이 키가 컸는지 작았는지, 체형이 날씬했는지 뚱뚱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성경의 저자들은 그런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불교의 생로병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중심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또한 무거운 테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웃음을 뺄 수 없다. 개신교의 주요 문헌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보면 인생의 목적에 대해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enjoy him forever”) 영어 원문에서 사용한 단어는 ‘enjoy’다. 신(神)을 ‘엔조이’한다, 신을 즐긴다고 했을 때 웃음이 빠질 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한다. 기쁠 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과격 이슬람주의와 이슬람을 혼동하기 쉽기 때문에, 이슬람 자체는 평화와 웃음의 종교라는 것을 망각하기 쉽다. 선지자 무함마드는 ‘이빨이 보이도록 웃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보통은 빙그레 웃는 정도였던 것 같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언젠가 어떤 할머니가 무함마드를 찾아와 낙원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무함마드는 “늙은 여자는 낙원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여자가 울면서 돌아가려고 하자 무함마드는 이렇게 덧붙였다. “늙은 여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젊은 여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종교적인 유머’는 어떻게 구사할 것인가. 우리 속담에 “웃느라 한 말에 초상난다”고 했다. 이슬람에서 말하는 조크의 원칙을 참조할 만하다. ‘조크로 그 누구도 모욕하지 말 것.’ ‘지나치게 웃지 말 것.’

다음과 같은 조크는 대상과 맥락을 잘 선택해야 할 것 같다.

- 신은 나르시시스트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 예수님이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이렇게 물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 사이에 시집가지는 않았지?”

자신이 없다면 아예 웃음을 빼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스타일을 존중해야 한다. 동서고금 수많은 성인이 웃음 없이도 경지에 이르렀다.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외교부 명예 정책자문위원. 단국대 인재 아카데미(초빙교수), 한경대 영어과(겸임교수), 서강대 국제대학원(연구교수)에서 강의했음.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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