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의 길을 가다(15)|한일국교정상화 20년맞아 다시 찾아본 문명의 젖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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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오오사까(대판)를 떠난 통신사 일행의 다음 행선지는 교오또(경도)였다.
지금의 동해도 본선 쾌속전차는 오오사까∼교오또간 42.8㎞의 거리를 불과 29분에 주파해준다.
그러나 12차례의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찾았던 에도(강호)시대에는 하룻길이 넘는 먼 여정이었다.
당시 오오사까에서 교오또로 가는 길은 배로 요도가와(정천) 강을 거슬러 올라가 요도(정)에 상륙한 후 여기서부터는 육로로 갔다.
역대 통신사가 한결같이 이 길을 택하고 있다.
오오사까에서 요도에 이르는 80리 물길은 흐름이 빨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강의 양쪽 둑에서 배에 줄을 매어 끌고 올라가야 했다.
신유한공 일행을 태운 호화누선은 각 배마다 20명의 사공이 삿대질을 하고 다시 강 양쪽에 각각 70명씩 1백40명이 배를 이끄는 호사스런 여행이었다. 1682년 통신사 때는 배를 끄는 선군(선군)만 3천명이나 동원됐다는 기록이 있다.
요도가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통신사일행의 스케줄은 원래 히라가다(매방)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당일로 요도에 상륙, 1박한 후 다음날 교오또로 들어가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신공때는 물살이 세어서 그랬는지 여정이 늦어져 어두워서야 히라가다에 도착, 이곳에서 저녁을 먹고 바로 밤길을 재촉하게 됐다.

<수차옮겨 사용하면 논물대기 안성마춤>
밤이 늦어 일행이 잠든 사이에도 배는 계속 상류로 올라가 다음날 새벽에는 요도성앞 나루에 닻을 내린다.
여기서 에도까지의 남은 일정은 육로로 이어진다. 요도는 뱃길의 종점인 동시에 육로여행의 시발점이었다고 할수 있다.
당시의 요도는 교오또분지에서 흘러내리는 우지(우치)내, 기즈(목률)내, 가쓰라(계)내가 요도가와와 합쳐지는 하천교통의 요지였다.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또미·히데요시」(풍신수길)는 이곳에 있던 폐성을 완전 개축하여 애첩 「요도기미」(정군)를 이 성에 살게한 내력을 갖고 있다.
「도요또미」가의 멸망후 「도꾸가와」(덕천)막부는 이곳에 직속무장을 파견, 천황이 살고있는 교오또를 감시하는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배가 도착하기 전에 선군들을 동원, 나루터앞 강의 토사를 모두 준설하고 강 가운데에 잎이 달린 대나무를 일렬로 꽂아 수로의 깊고 얕음을 알수 있게 해놓았다.
일행이 배를 대놓은 곳에는 통신사 전용의 돌계단을 따로 만들고 돌계단 주변에는 밤새 등을 켜고 모닥불을 피워놓아 그 불빛이 물에 비치어 현란할 정도였다.
통신사 전용 돌계단은 조선인만이 쓰는 나루라는 뜻에서 「도오진강기」(당률안목)라고 불렀다.
통신사 일행은 전용 돌계단을 밟고 상륙한 후 요도성밖의 영빈관으로 안내되어 요도성주가 베푸는 향연을 받았다.
요도성의 성벽 바로 옆으로는 강이 흐르고 성밖에는 수차(수차) 2대를 설치, 이것으로 물을 퍼올려 성중에 물을 대도록 되어 있었다.
요도를 거쳐가는 통신사 일행에게는 이 수차가 큰 관심거리였던 듯 하다.
신공은 『해유록』에 수차얘기를 쓰고 있지만 다른 사행때 이곳에 왔던 이들도 수차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1764년 사행때의 정사 조엄은 한걸음 나아가 수행원에게 수차의 얼개를 자세히 조사하도록 지시하고 『만일 그 제작방법을 옮겨다가 우리나라에 사용한다면 논에 물을 대기 유리하겠는데 조사를 시킨 두 사람이 성공할지 여부를 알수 없다』고 쓰고 있다.
이처럼 한일교류의 무대로서 낭만과 에피소드의 꽃을 피웠던 요도도 지금은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 옛날의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오오사까의 요도야바시(정옥교)에서 교오또행 게이한(경판)전철 급행을 타고 35분을 달리니 야하다(팔번)역에 닿는다. 이곳에서 완행으로 갈아타고 한 역을 더 가 요도역에 내렸다.
요도는 행정구역으로는 교오또시 후시미(복견)구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이름만 교오또 시내일뿐 대도회의 냄새보다는 시골 색채가 더욱 깊다.
초라한 역사(역사)를 벗어나 택시를 타니 목표로 삼고 온 요도성터까지는 1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였다.
납작한 점포들이 늘어선 상가를 뚫고 지나가 몇차례 골목을 꺾으니 제법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그 끝에 잡초 우거진 해자와 물에 잠긴 석축이 시야를 막는다. 요도성터다.
그러나 지금은 물을 퍼 올리던 수차도, 총 쏘는 구멍이 뚫린 성루도 간곳 없고 해자와 석축의 일부만이 남아 역사의 현장임을 간신히 알게 해준다.
성벽을 감아 돌던 요도가와 강도 물길이 바뀌어 성터주변은 주택가로 변했으며 통신사 일행이 딛고 상륙했다는 전용 돌계단도 어디에 묻혔는지 찾을 길 없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있지만 여기서는 벽해가 바뀌어 상전이 된 감이 절실하다.
지금의 요도는 이미 조선통신사와는 무연한 곳이 되었음을 절감케 했다.
다시 옛 기록을 더듬어보자.

<짐실을 말·인부없어 또한차례 소동벌여>
요도에서 성의에 가득찬 환대를 받은 통신사 일행은 의장대를 앞세우고 정사는 옥교(옥교), 부사·종사관·제술관 등은 현교(현교), 그밖의 수행원은 지위에 따라 말을 타거나 혹은 보행으로 대행렬을 이루어 교오또로 향한다.
이때 이용한 길은 지금의 국도 1호선을 따라 교오또 시내로 들어가 동사옆을 통과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해유록』은 동사옆을 지나갈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길 왼편의 반공중에 아득히 솟아있는 2층의 누가있다. 이름을 동사라 한다. 나는 그것이 궁궐이 아닌가 의심했다. 동사를 지나면서 층루와 보각을 보니 금은이 휘황찬란한 것이 또한 모두 기록조차 할수 없다.』
신공이 이처럼 찬탄한 동사는 818년에 창건된 유서깊은 대가람으로 지금도 신공이 보았을 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신공일행이 요도의 영빈관을 출발할때 일본인의 잔꾀로 인한 뜻밖의 소동이 벌어져 통신사의 발자취에 또 하나의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긴다.
사람이 탈 가마와 말은 준비가 돼있는데 일행의 의농과 행리를 실어나를 말과 인부가 모자라는 딱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일본측은 통신사 일행의 육로여행에 대비해서 이미 5개월전부터 준비에 착수, 8백34명의 인부와 8백11필의 말을 준비해놓고 예행연습까지 끝낸 뒤였다.
그런데 이처럼 중대한 차질이 생긴 것이다.
당시의 사건 경위를 신공은 『해유록』에 이렇게 남기고 있다. 『사행에 소용되는 사람타는 말과 짐 싣는 말을 수를 맞추어 준비하는데도 이 나라에는 법이 있다한다. 그런데 마주(대마도)의 왜인들 가운데서 속임수를 부려 당일 닭이 울 무렵에 그 말을 이용해서 먼저 저들의 행장을 실어보냈다. 그랬더니 말을 빌려주는 사람들이 그들의 속임수를 알고 되돌아 오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대마도의 왜인들이 꾀를 부려 자기들이 지고 가야할 짐까지 사행을 위해 준비한 짐꾼에게 넘겨 2중 일을 시키려다 탄로가 난 것이다.
사신 일행이 출발을 거부하니 대마도의 봉행배들이 창황하게 빌며 사실이 위에 알려지면 생명이 위태하니 눈을 감아달라고 애원한다.
일행은 하는 수 없이 행장을 남겨둔 채 길을 떠나지만 이 소동으로 출발이 늦어져 이날 한밤중에야 교오또에 도착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뒤에 남기고 온 짐의 도착이 늦어져 만 이틀간이나 옷도 제대로 갈아 입지 못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글 신성순 특파원 사진 장남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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