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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beyond M |마술 그 이상의 예술을 꿈꾸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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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연소 프로 마술사, 한국인 최초 세계마술올림픽 챔피언…. 지금까지 이은결(35)의 이름 앞에 따라붙은 수사는 많았다.

데뷔 20주년 맞은 일루셔니스트 이은결

비단 마술 분야에서만은 아니다. TV 예능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2015~, MBC) ‘더 지니어스:룰 브레이커’(2013~2014, tvN) 등에 출연하며 솔직한 면모와 재치 있는 입담으로 이미 얼굴을 널리 알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마술계에 뛰어든 그는, 5월 4일부터 15일까지 데뷔 20주년 기념 공연 ‘ILLUSIONIST(일루셔니스트) 이은결’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펼칠 예정이다.

국립극장에서 마술 공연이 열리는 건 이번이 처음. 하지만 당장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마술사 이은결의 화려한 무대만이 아니다.

그는 지난 3월 ‘두산인문극장 2016:모험’ 일환으로 열린 실험 공연 ‘멜리에스 일루션:에피소드’를 비롯, 이미 2년 전부터 마술의 한계와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작가다. 당신이 알던 마술사 그 이상의 ‘일루셔니스트’ 이은결을 만났다.

이은결이 작가로서 뚜렷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건, 2010년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와 협업한 퍼포먼스 공연 ‘Cine Magician(시네 매지션)’을 준비하면서부터다. 최초의 극영화 연출가이자 마술사였던 프랑스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1861~1938)를 모티브로 삼은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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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작가와의 새로운 작업은, 2006년 한국인 최초로 세계마술연맹(FISM·F´ed´eration Internationale des Soci´et´es Magiques)이 개최하는 월드 챔피언십 우승 이후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진 마술사 이은결에게 강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실험적인 공연에 나서기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10년 전쯤이었나. 더 이상 내 마술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마술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날 특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2006년 데뷔 1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할 때도 나름 세계적인 수준의 공연을 만들었다고 자부했는데, 곰곰이 되짚어 보니 ‘과연 이 공연이 온전히 내 것인가’라는 의구심과 불안감이 몰려왔다. 이대로 자기 복제만 거듭하게 될까 두려웠다.”

‘시네 매지션’ 공연을 준비하며 멜리에스 감독에 대해 공부하던 그는 문득 ‘영화의 발명이 마술의 위기를 불러온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100여 년 전 멜리에스가 마술사로서 느꼈을 위기의식과 새로운 표현법을 향한 그의 열망에 공감했던 이은결은 “멜리에스 감독의 고민을 끌어와, 지금 나의 고민을 투영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마술사로서의 위기의식을 느낀 거네.
“남들 눈에 한창 잘나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는데, 데뷔 10주년에 비로소 그 찜찜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사람이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창조적인 대안을 내놓는 것은 보통 한계나 위기에 직면할 때 아닌가. 이름 없는 마술사였던 멜리에스 감독이 최초의 극영화, 그것도 SF영화를 만든 건 절대 우연이 아니더라. 마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화의 오락·예술적 잠재력이 멜리에스 감독 눈에 보였겠지. 마술이 가짜임을 숨겨야 할 마술사가 허구성을 내세운 SF 극영화를 만든 점이 흥미로웠다.”
영화와 마술 모두 환상에 기반을 둔다는 점에서 두 분야가 닮은 것 같다.
“둘 다 뿌리가 같다. 영화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상상력이 스크린에 그대로 실현되면서 아이러니하게 상상력은 더 빈곤해졌다. 영화가 마술을 대체하며 마술이 설 자리가 무척 좁아졌고, 영화 역시 2차원 평면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멜리에스 일루션’ 프로젝트는 마술과 영화의 시공간성을 무대에서 재현하면서 양쪽 분야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연작 시리즈다. 마술과 영화가 동시에 추구해야 할 환영, 즉 일루션(Illusion·환영)의 역할이 무엇인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논하고 싶었다. 다만 내 언어는 마술이기에, 이 문제에 대한 내 의견을 마술 공연 형태로 보여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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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열린 ‘멜리에스 일루션:에피소드’에서 이은결은 스톱 모션과 이중 노출,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회전하는 원통 안에 그림과 거울을 배치해, 그림이 움직이는 착시를 유도한 애니메이션 장치) 등의 초기 영화 기법을 활용해 70분간 마술과 영화가 접목된 공연을 펼쳤다.

스크린과 무대 그리고 무대를 비추는 카메라를 오가며, 마술사 멜리에스가 극영화를 발명하는 순간부터 그의 환상을 영화 세트와 스크린에 옮기는 과정까지 무언극 퍼포먼스로 재현했다.

멜리에스 감독이 세트를 짓는 과정이나 촬영 도중 벌어지는 실수처럼 영화 제작 뒷이야기도 상상해서 담았다. 가상과 현실이 한 공간에서 만나는 마술 쇼와 분명히 다른 실험 퍼포먼스다.

‘일루션’이란 말을 조금 더 쉽게 설명해 달라. 스스로 마술사가 아닌 일루셔니스트라고 소개하던데.
“일루션이란 마술보다 한 차원 더 넓은 개념이다. 예를 들어 마술이 A라는 원인, B라는 과정, C라는 결과로 구성돼 있다고 치자. 사람들은 A(원인)에서 C(결과)를 발견하고 놀라지만, 이는 마술사들이 B(과정)를 일종의 포장지로 교묘하게 감춘 거다. 속임수가 아니더라도 핑거 발레(Finger Ballet·손과 손가락으로 여러 형상을 표현하는 퍼포먼스)·그림자극 등 마술에서 환영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처럼 일루션은 속임수 같은 포장지에 의지하지 않고도 마술의 과정이 될 만한 새로운 환영을 의미한다.”

이은결에 따르면 마술은 결국 허상을 이용해 관객의 눈을 속이는 ‘픽션’이다. 과거엔 이게 통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이성적·과학적 사고가 자리잡으며 마술사의 픽션은 힘을 잃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대부분의 마술사가 마술이란 픽션을 ‘다큐멘터리’처럼 보여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마술 도중 손가락을 튕기거나 움켜쥔 손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 등은 마술사 자신에게 신비한 힘이 있음을 강조하는 주술적 행위다. 주술에 바탕을 둔 신비주의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마술은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다.”

이은결의 말이다.

따라서 “뻔한 속임수를 과감히 버리고 조금 더 색다른 상상력으로 지금 이 시대에 걸맞은 환영의 표현 방식인 ‘일루션’을 찾는 것, 그게 일루셔니스트 이은결의 목표”라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마술의 역사를 가장 적확한 방식으로 계승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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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당신이 무대에서 보여 주고 싶은 건 무엇인가.
“마술을 넘어선 무엇, 즉 예술이다. 마술은 두 번 사망 선고를 받았다. 극영화의 발명으로 처음 죽음을 맞았고, 인터넷의 등장으로 모든 지식과 비법을 공유하게 되면서 또다시 죽었다. 마술의 개념은 오래전에 무너졌지만, 대중은 여전히 현실 너머의 환상을 필요로 한다. 환영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영감을 던지는 이가 바로 일루셔니스트다. 로베르트 후댕(1805~71)·해리 후디니(1874~1926)·멜리에스 같은 사람들이 당대에 가장 혁신적인 방식으로 환영을 이끌어 낸 것처럼, 이 시대의 예술가도 현대 기술을 토대로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려면 상상력을 어떻게 유지하고 응용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대중적인 공연과 실험적인 예술을 함께하고 있다. 20주년 기념 공연은 조금 다르게 준비할 것 같은데.
“20주년 공연은 대중을 위한 공연이다. 많은 분들이 재미있어 할 퍼포먼스가 주가 되고, ‘멜리에스 일루션’ 같은 실험 공연은 중간에 짧게 삽입할 예정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관객에게 보여 주면서 재미도 놓치지 않는 공연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5년 전 무대에 올린 공연 ‘THE ILLUSION(더 일루션)’처럼 이번에도 새로운 걸 시도하려 하는데 솔직히 부담이 크다. 10주년 때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20주년인 만큼 세월에 걸맞은 성과를 보여 줘야 할 것 같아서(웃음).”
30주년에 대한 밑그림도 그려 봤나.
“10대 때는 상상하지 못한 멋진 20대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20대에 꿈꾼 적 없는 30대를 만끽하고 있다. 10년 후에는 훨씬 더 열린 마음과 의지를 갖고, 지금 목표한 것보다 더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술은 가능성을 현실로 보여 주는 행위다. 멜리에스 감독의 영화이자 당시에는 ‘마술’이었던 ‘달세계 여행’(1902)처럼, 60여 년 후 인류는 실제로 달을 밟았으니까. 나 역시 일루션을 통해 현재와 미래에 영감과 화두를 던질 수 있었으면 한다.”
마술의 역사와 미래를 망라하는 이 작업은, 결국 ‘인간 이은결은 누구인가’에 대한 사적인 탐구에서 시작된 것 같다.
“맞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싶은 지에 대한 질문의 연속인 셈이다. 대중 앞에서는 일루셔니스트 이은결이지만, 작품을 만드는 건 ‘나’로서 존재하기 위한 행위다. 마술사로서의 쇼맨십도 창작자로서의 의무감도 아닌, 그저 이야기와 고민을 공유하고 싶은 한 사람으로서 말이다.”

<작가 이은결의 장기 프로젝트 '멜리에스 일루션'>
‘멜리에스 일루션’ 프로젝트는 최초의 극영화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에게 영감을 얻은 1인 퍼포먼스 공연이다. 이중 노출이나 페이드 인(Fade In·화면이 어둡다가 점차 밝아지는 것)처럼 그가 처음 시도한 역사적인 영화 기법들을 무대 공연으로 구현한다.

멜리에스 감독의 죽음과 함께 그가 극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탄생시킨 과정을 되짚으며, 마술과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이은결은 향후 10년간 지속적인 개발을 거쳐 연작 형태의 공연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해 ‘멜리에스 일루션:프롤로그’를 시작으로, 올해 두 번째 공연 ‘멜리에스 일루션:에피소드’를 공개했다.

이때만큼은 이은결의 이름이 아닌 작가 ‘일루셔니스트 EG’로 무대에 선다. 국제 다원 예술 축제 ‘페스티벌 봄’은 지난 1월 프랑스 파리 시립 극장에 초청된 실험 공연 ‘디렉션’(2014)부터 일루셔니스트 EG의 파트너로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 영화와 마술을 오가는 이 독특한 공연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이은결의 대답은 “현실 영화”다. 무대와 스크린을 넘나들며 실시간 상영되는 영화란 의미에서다. ‘멜리에스 일루션’은 마술사 멜리에스에 바치는 오마주이자, 마술의 미래를 향해 이은결이 던지는 질문이다.

-beyond M-
magazine M의 문화 가로지르기 프로젝트. 웹툰·TV·문학·음악·연극 등 다양한 분야의 핫한 인물을 만나고 새 흐름을 탐구합니다. 문화로 통하고 연결되며 풍성해지는 M 너머의 이야기.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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