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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열 “출자보다 대출” 자본확충펀드 제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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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국책은행의 자본을 늘리기 위해 ‘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발권력 이용, 타당한 이유 있어야”
정부 요구 수용+손실 최소 ‘절충’
7년 전 4조 집행했지만 효과 적어
“출자 가능성 닫은 건 아니다”

이 총재는 4일(현지시간) ‘아세안+3(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에 참석차 방문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자간담회를 했다. 그는 “기업 구조조정에 발권력을 이용하려면 납득할 만한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며 “중앙은행이 투입한 돈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게 기본 원칙”이라고 말했다. 한은이 국책은행에 직접 출자하는 것은 이런 원칙과는 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이 총재는 “손실 최소화 원칙에서 보면 출자보다 대출이 부합한다”고 덧붙였다.

출자는 직접 자본 투자를 해서 대주주로 참여하는 방식이다. 조선·해운업 부실이 커져 한은이 출자한 국책은행의 부실이 커진다면 한은이 출자한 지분 가치는 떨어진다. 이렇게 손실을 보면 책임은 한은에 돌아간다. 대출은 다르다. 담보도 잡고 이자도 챙길 수 있다. 정부가 국책은행 자본확충 방법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는 사이 이 총재가 자본확충펀드란 구체적 카드를 제시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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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방안 제시를 통해 한은이 구조조정에 소극적이란 일부 비판도 희석시킬 수 있다. 김경수 성균관대(경제학) 교수는 “계속된 정부의 요구로 인해 어떤 형태로든 자금을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은이 택한 절충안”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한은은 국책은행의 자본확충에 협력하기로 했지만 필요한 돈을 어디서 낼지를 놓고선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한은에서 공식 제안을 하면 펀드 부담, 담보, 이자율 등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협의를 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2009년과 달리 정부가 직접 참여를 한다면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해야 한다”며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가 제시한 ‘자본확충펀드’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번졌던 2009년에 처음 조성됐다. 한은과 국책금융기관, 기관투자가가 함께 은행에 자금을 지원해 시중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을 높여 주기 위해 도입됐다. 계획한 규모는 20조원. 한은이 10조원을 산업은행에 대출하고 산은이 2조원을 보태 12조원을 펀드에 투입하기로 했다.

나머지 8조원은 기관투자가를 통해 조달한다는 계획이었다. 시중은행이 요청을 하면 펀드가 은행이 발행한 후순위채와 신종자본증권을 사주는 형태로 자본확충을 도와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높은 이자와 까다로운 조건, 대규모로 지원받을 경우 부실은행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은행들의 우려로 예상보다 수요가 적었다. 실제 집행 규모는 3조9500억원이었고 한은 대출 규모는 3조3000억원에 그쳤다.

이 때문에 이 총재가 제안한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도 비슷한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경제학) 교수는 “구조조정이 실시되면 현재의 부실보다 더 많은 부실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할 것”이라며 “우선적으로 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해 긴급 수혈을 하더라도 법 개정 등을 통해 중앙은행이 추가로 출자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둬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총재 역시 출자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출자 방식을 100% 배제하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한은이 산은에 출자를 할 수는 없지만 수출입은행 증자엔 참여할 수 있다. 한은 관계자는 "손실 최소화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출자할 수 있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조현숙 기자, 하남현·김경진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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