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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0)-제82화 출판의길40년(43)-『개벽』발행금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일제하의 출판법이나 신문지법에서는 「안녕질서를 교란하거나 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출판물의 발매 반포를 금지할 수 있다」라고한 한 규정이 있기때문에 이 행정권은 사실상 사전 사후 검열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치하 조선에서의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 언론의 자유등은 생각 할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1926년8월1일자 발행 8월호(통권72호)에 박춘자집필의「모스코에 신설된 국제농학원」이란 논문으로 『개벽』은 기어이 발행금지처분을 받는다. 여기서『개벽』의 발금에 관하여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 1926년8월4일자 동아일보의 「개벽발행금지를 보고」란 사설은 하나의 좋은 자료가 된다. 이 사설의 논지는 한마디로 동업『개벽』의 죽음에 대한 울부짖음같은 것이었다.
-자유가 현대의 특색이라 하면 언론은 현대인의 권리다. 언론이 없는 곳에 자유가 없고, 자유가 없는 곳에 노예는 있고 금수는 있을는지 알수 없으나 인간은 없다. (중략) 인민의 자유를 무시하는 정치는 현대에 있어서 존속할 윤리적 근거를 상실한 것과 같이 언론의 자유가 없는 정치는 현대인의 식견이나 양심과는 도저히 합치될 성질이 없다.
이것이 이 사설의 서두다. 아울러 그 사실의 대요를 말하면, 창간후 72호를 발행하는 동안 거의 그 반수인 33회가 발매금지를 당했으니 당시 조선에서 시사문제를 쓰는 조선문 잡지가 4종에 불과하고 이중에『개벽』만이 겨우 그 경영을 부지하는 터에 이 잡지를 영영 발행을 금지한다는 것은 너무나 혹심한 정책이 아닌가라고 힐난과 유감의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설이 조선을 다스린다는 그들에게 아무런 파급을 주지못할 것이라는 조선인의 억울함도 이 사설에서 읽을수 있었다.
또 잡지연구가 김근수교수는 -『개벽』은 일제하 36년을 통하여 우리나라 신문화사상 가장 권위있는 대표적 종합지로서 우리에게 문화적으로,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준 잡지이며 이 땅에 처음나온 본격적인 종합잡지요, 언론잡지이기도하다. 일제하에서 발간된 6백여종의 잡지중에서 대표적인 잡지를 든다면, 언론지로서『개벽』, 문학에 있어서는 『문장』과『인문평론』을 들지 않을 수 없다-고 논평하고 있다.
『개벽』은 잡지사상 본격적 종합잡지란 점을 부연한다면, 전회에 소개한 『소년』『청춘』등이 거의 기사의 필자명을 밝히지 않았었는데 반하여 『개벽』에서는 어느 기사나 기명기사라는 것이다. 전자가 사적인 성격의 잡지라면 『개벽』은 공기적인 기능을 띤 현대잡지로서 탈바꿈이 이루어진 것을 알수 있다. 또 『개벽』은 독자가 7천∼8천명이나 되었고 다른 잡지는 고료를 지불하지 못했으나 이 잡지는 시 한편에 5원이 기준이었고, 산문은 4백자 인찰지1장에 3O전∼3원을 주었다.
한편 광고도 전번에 소개한 『청춘』에 비하면 다양한 광고와 분량도 『청춘』창간호의 타사 광고 4, 5면에 비하여 『개벽』창간호는 17면이나 되었다.
끝으로『개벽』의 정간 (통권62호)의 원인이 된 기사는 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밖에 있는 이 생각-이역풍상에 기체안녕하신가-」라는 제목아래 우리의 혁명가·애국지사 이동휘 서재필 유동설 이승만 김규식 노백인 이시영 안창호 이동영 남만춘 박은식 신채호등 12분을 소개한 글이 그것이었다. 정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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