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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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나는 평소 시조의 우위성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맹목적인 시조 우위로 주창자를 문화적 국수주의자로 지탄해 오고 있는 터다. 사람도 사람나름, 예술도 예술나름, 글도 글나름, 시조도 시조나름이다. 어찌 시조라는 명색으로 거두어진 시라고 해서 하나같이 훌륭하다고만 이를 것인가.
그러나, 단 하나, 시조가 이른바 「생활시」의 그릇으로는 안성마춤이라는 생각만은 일종의 신앙처럼 굳혀오고 있다. 워낙 그 「그릇」자체가 그러한 몫을 하기에 알맞은 호흡속에서 빚어지고, 오랜 세월에 걸쳐 숱한 손때에 절여 왔었다는 내력에 근거를 둔 발상만이 아니다.
그 보다는 고도한 시적 수련을 쌓지 않은 경우에도「말이 곧 시」라는 차원에서의 초보적(원초적)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적어도 우리 한국사람에게는 그것 이상으로 덮을 것이 따로 없다는 당위성에서다. 말법 <언어구조>이 그러하고 가락<어조>이 그러하며, 이것들을 바탕으로 정제된 그틀<형태>이 그러하다.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익힌 우리들 생리의 한 분신이 아닌가.
『제비꽃』과 『5월의 하늘』을 보라. 시적 감수성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수용능력에 있어 서툴기는 마찬가지다. 어느 한 장에서 각기 기본 자수를 벗어나고 있는데, 그러나 파탄을 불러올 정도로 엄청난 것은 아니다. 의도적 탈법이 아닌 서툰 시늉들임에도 그 우연이 적당히 먹혀들고 있는 필연은 무엇인가.
『차 한잔에』를 만나면 소박한 일상의 편린들을 거둬 담기에 시조의 그릇이 얼마나 적합하고 또 자연스러운가를 더욱 절감하게 된다. 평이한 서술에 머문채로 억지가 느껴지지 않는 방법이며 가락의 혼행에서 그 점을 모자람없이 읽는 것이다. 『나룻배』와 『파도』는 은유의 수법으로 다진 상징성이 매력이기는 하나, 그 매력에 너무 이끌린 나머지 의미의 핵을 놓친 대목들을 거느리고 있다. 앞의 것은 초장에서 두드러지고, 뒤의 것은 중장에서 드러난다. 웬만큼 길들어진 솜씨들이기에 곁들이는 말이지만, 제발 잔기교에 매달리지 말기를 당부해 둔다. 박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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