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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다선 중진의 권력 독점 끝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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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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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

처음엔 그저 평범한 흰색·녹색의 용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위에 2400여만 주권자(투표자)의 선택이 실리는 순간 투표지는 최고·최종의 주문서가 된다. 지난주에 유권자들은 채찍질·경고·변화의 메시지를 담은 주문서를 내놓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신 3당체제라는 새로운 구조다. 2007년 대선 이후 대통령 소속 당에 과반수 의석을 줄곧 밀어 주던 유권자들은 10년 만에 물줄기를 크게 바꿨다(국회선진화법 이후 과반 의석의 의미가 얼마간 퇴색하기는 했지만).

유권자들은 무능과 오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여당에 혹독한 경고를 보냈고, 혁신의 시계가 멈춘 더불어민주당에는 절반의 승리만을 안겨 줬다. 또한 국민의당에 정당 비례 득표 2위 자리를 줌으로써 변화에 대한 불씨도 살려 뒀다. 혹독한 경고, 못 미더운 지지, 변화의 불씨를 종합하면 과반 의석 정당 없이 주요 3당이 합의해야만 굴러갈 수 있는 다당제 국회라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박근혜 대통령뿐만 아니라 차기 대통령도 임기 초반 2년까지는 3당체제 국회와 함께 일하라는 유권자의 주문이 제시된 셈이다.

세계 10위권 규모의 한국 경제를 예의주시하는 바깥 세계의 관측가들은 신 3당체제에 대해 비관적이다. 알파고·가상현실·자율주행차 등으로 상징되는 4차 산업혁명으로의 적응, 인구절벽과 노령사회의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는 한국 경제가 이제 정당들 간의 교착이라는 리스크를 하나 더 짊어지게 됐다는 게 해외 관측가들의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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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차가운 염려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우리 정당들이 두 가지 딜레마를 넘어선다면 3당 간 타협의 정치가 작동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져 본다. 첫째 과제는 미국의 정치학자 메이(May)가 관찰한 바 있는 정당들의 이념 편향 딜레마다. 그동안 중앙일보·정당학회 공동조사가 밝혀 왔듯이 놀랍게도 주요 정당 의원들은 자신들의 지지자들보다 더 이념적으로 편향돼 있다. 20대 국회 자료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새누리당 의원들의 평균 이념 위치는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위치보다 더 보수적이고, 더민주 의원들의 평균 이념은 자신의 지지자들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이념 스펙트럼에 늘어놓으면 더민주 의원 평균>더민주 지지자-----새누리당 지지자<새누리당 의원 평균의 모양새가 된다. 즉 양대 정당 지지자들의 이념적 거리보다 의원들 간의 이념 거리가 더 넓은 이념 편향이 타협의 정치를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이념적으로 편향된 의원들의 정당 대립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텃밭 지역에서 손쉽게 선수를 쌓는 안전지대 출신 중진들이다. 눈부시게 변화하는 세상 흐름과는 무관하게 오직 당내 권력정치만으로 다선에 오른 이들 텃밭 출신 중진이 국회 주요직과 정당 권력을 독점하고 국회 운영을 좌지우지한다. 이들이 바로 지난 19대 국회 교착정치의 장본인이고 지난달 막장 공천의 주연이다.

참고가 될 만한 해법은 1970년대 미국 의회, 정당 개혁이다. 워터게이트, 월남전 패배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화의 열기가 가득했던 70년대 미국에서 의회는 정체된 농촌 출신의 다선 중진들이 지배하는 고장 난 의회(broken branch)였다. 이에 맞서 미국 의회 개혁파들은 다선 경력에 따라 국회의장·상임위원장을 독차지하는 다선 서열제를 타파하고 소위원회 제도를 통해 의회, 정당 권력의 분권화를 추진했다. 분권화가 이뤄지면서 어느덧 의회 안에서 민주·공화 양당 간 타협의 기회도 많아졌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권자의 주문대로 타협의 정치를 열어 가려면 무엇보다 텃밭 출신 다선 중진들의 권력 독점을 끝내야 한다. 그 대신 수도권 중진과 여러 중간그룹이 국회와 정당 운영을 주도하는 권한을 가질 때 정당 간 타협의 정치는 보다 수월해진다.

신 3당체제가 마주하는 둘째 관문은 정당 협상의 투 레벨(two level) 딜레마다. 19대 국회에서도 봤듯이 여야 원내대표들이 쟁점 법안 등에 힘겹게 합의하더라도 당내 강경파의 반발에 부닥쳐 공염불이 되곤 했다. 달리 말해 20대 국회 3당체제 타협정치는 정당 사이의 합의와 정당 내부의 합의라는 두 차원에 걸쳐 있는 문제다. 이 점에서는 확고한 대선 주자가 당내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될 더민주와 국민의당의 형편이 좀 더 나을 수도 있다. 문재인 전 대표와 안철수 대표의 견고한 대선 후보 지지율이 유지된다면 이들을 축으로 하는 응집력은 당내 합의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정작 뚜렷한 대선 후보가 아직 없는 새누리당의 복잡한 사정이 오히려 신 3당체제 타협정치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두 가지 딜레마가 모두 수월한 관문은 아니다. 하지만 타협의 정치라는 유권자의 주문은 피할 수 없는 시대 흐름이다. 이제 주권의 대리인들이 유권자의 주문에 응답할 시간이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