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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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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없어서 못 먹던 시절에 쌀밥 한 그릇은 행복이었다. 직업을 밥줄이라 하고 '밥술을 놓다'가 '죽다'의 곁말인 걸 보면 밥은 목숨이자 생명이라 할 수 있다. 배부르게 먹여 주겠다며 자유고 인권이고 나라님 맘대로 하던 시절을 벗어나는 데 꽤 오래 걸린 까닭이다. 그만큼 굶주림은 무섭다.

이렇게 무서운 밥 굶기의 고생을 사서 하자는 사람이 있다. 대전에서 평화의 마을을 열고 있는 권술룡씨다. 그는 오늘부터 주말까지 제1회 지구촌 공동 단식을 하자고 나섰다. 22일 '지구의 날'을 단식으로 되새기자는 뜻을 담았다. 병들고 지친 지구를 살리는 작은 실천으로 닷새 동안 식사를 끊고 몸과 마음을 맑게 만들자는 비움의 축제다. 잘 먹고 잘 놀겠다고 지구를 못살게 하는 일을 잠시라도 멈추자며 그는 말한다. "먹는 즐거움이 있으면 먹지 않는 즐거움도 있다."

권씨가 권하는 방법은 단식을 처음 하는 사람이나 직장인도 어렵지 않은 야채 효소 단식법(http://cafe.daum.net/kwonsay)이다. 단식보다 더 중요한 복식(復食) 과정도 친절하게 설명돼 있다.명상과 묵상으로 욕심과 소란을 다스리는 일도 단식이다. 육신과 영혼을 모두 비우고 생태적으로 살아보는 일이 지구촌 공동 단식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다.

'단식이 건강에 좋다는데' 하는 마음으로 이 비움의 축제에 참가하려는 이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체중감량만이 목표이면 곤란하다'는 유의사항이 붙어 있다. 과욕을 줄이는 것이 더 소중하다. 배 나오는 건 걱정하면서 피둥피둥 기름때가 낀 마음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현대인에게 권하는 정신의 다이어트다.

몇 끼 밥값이 굳었다면 그 돈으로 할 일은 많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 어린이 돕기 운동에 보태는 건 어떨까. 나눔문화(www.nanum.com)의 박노해 시인이 벌이는 '아체 고아들에게 희망의 깜빙(염소) 사주기'도 있다. 지진해일(쓰나미) 사태로 '축복의 땅'에서 '저주받은 땅'으로 변해버린 아체의 부모 잃은 어린이 500명은 지금 5만원쯤 하는 염소 한 마리씩이면 흐르는 눈물을 닦고 일어선다.

'지구의 날'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날'이기도 하다. 덜 먹고 더 나누는 단식이야말로 굶기의 예술이자 인간적 행위예술이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