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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물림하는 가난] 3. 기초생활보장제 허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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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000년 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됐던 金모(57.여.서울 마포구)씨. 그는 당시 정부가 지원하는 자활 (自活) 공동체인 출장뷔페 사업단에서 '탈(脫) 빈곤'의 꿈을 안고 하루에 무려 14~15시간 일했다.

그 덕에 한달 벌이가 1백만원을 넘어 2001년 8월 수급자에서 벗어났다. 사정이 나아져 한달에 30만~40만원씩 저축도 했다. 하지만 반찬가게를 꾸려가던 지난해 7월 출근길에 넘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져 다시 수급자가 됐다.

그때 저축한 돈을 치료비로 다 까먹었고 지금은 몸도 성치 못해 자활 공동체에서 월 50만원 가량 벌고 있다.

2000년 10월 기초생활보장제가 시행된 뒤 金씨처럼 자활에 성공해 '수급자'란 딱지를 뗀 5천여명은 어떻게 됐을까. 자활 성공이 과연 탈빈곤으로 이어졌을까.

"자활 성공이란 의미는 수급자에서 겨우 벗어났다는 의미다. 그 이상 확대 해석하지 말라."

정부 당국자의 말이다. 그렇다고 이를 탓할 수도 없다. 기초생활보장제 시행 당시 자활사업의 기반이 거의 없이 출발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는 얘기다.

탈빈곤이 쉽지 않은 이유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의 노동 경쟁력이 떨어지고 이들에게 적합한 사업이 그리 많지 않은 탓도 있다. 정부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머나먼 탈빈곤의 길=8일 서울의 한 공원에 공공근로를 나온 김진수(55.지체장애 5급)씨는 "오늘도 모래주머니 쌓으면서 시간을 때워야지"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는 힘겹게 장마 대비용 모래주머니를 움직인다.

金씨에게 공공근로는 탈빈곤은커녕 호구지책일 뿐이다. 서울 서대문구청 김경희 사회복지사는 "金씨와 같은 사람들은 이 사업마저 중단하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당장 생계가 어려워진다"고 했다.

공공근로보다 한 단계 위인 자활 사업단은 어떤가. 서울 모 구청 산하 도시락 사업단에 참여하는 李모(45.여)씨는 "내가 노력하는 만큼의 대가가 없다. 열심히 하건 대충하건 똑같다"며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다"고 했다.

연세대 이혜경 교수는 "수급자가 40만원을 벌면 현금 기준 최저생계비(4인가족 기준 89만7천원)에 모자라는 49만원을 정부에서 받는 반면 아예 벌지 않으면 89만원을 그냥 받을 수 있다"며 "노동의욕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무엇이 문제인가=경기도 안양시 안양동 崔모(55.여)씨는 2001년 수급자에서 벗어나 중소기업의 생산직(일용직)으로 일하며 한달에 70만~80만원을 벌었다.

하지만 요즘은 경기가 안 좋아 수입이 월 60만원 이하로 떨어졌다. 崔씨는 의료비 혜택이 사라져 종전의 빈곤선을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한국도시연구소 신명호 부소장은 "수급자들 중에서 탈빈곤 의지가 있는 사람도 의료혜택이 사라지는데 누가 수급자에서 벗어나려 하겠느냐"고 제도 개선을 강조한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조흥식 교수는 "현행 기초생활보장제는 자식의 어버이 부양을 강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자식까지 빈곤의 덫에 빠진다"고 비판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문형표 재정복지팀장은 "현행 제도는 열심히 일해봤자 오히려 손해를 보도록 돼 있다. 가만히 있는 게 낫다. 이 같은 도덕적 해이는 선진국에서 증명됐다"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기간을 제한하지 않으면 '빈곤의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본지와 사회보장학회의 조사 결과 4백20명의 수급자 중 42% 가량은 종전의 생활보호제나 현행 기초생활보장제에서 3년 이상 보호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별취재팀=정책기획부: 신성식.하현옥.권근영 기자

<사진설명전문>
세탁 자활사업에 참가한 한 여성이 무거운 세탁물을 옮기고 있다. 열심히 일하나, 가만히 있으나 정부가 똑같이 지원해주면 오히려 빈곤층의 '탈빈곤'의지가 약해질 수 있다. [김상선 기자<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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