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자전거는 자전거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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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에 사는 정영식(35)씨는 지난해 140만원을 주고 전기자전거를 샀다. 집에서 6㎞ 정도 떨어진 회사 출퇴근에 쓰기 위해서다.

작년 세계서 4000만대 판매
BMW·벤츠·혼다 등 개발 가세
한국, 사실상 오토바이로 분류
자전거 전용도로 이용 못 해
“규제 놔두면 쌓은 기술 버릴 판”

정씨는 “일반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면 땀 때문에 업무 보기가 힘든데 전기자전거는 모터가 도와줘 오르막을 달려도 힘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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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처럼 모터와 배터리로 작동하는 전기자전거를 찾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 소비가 늘자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기업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기존 자전거 업체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BMW·벤츠·푸조·혼다 등 자동차 브랜드까지 전기자전거 개발 경쟁에 가세했다. 중국 샤오미 같은 정보기술(IT) 업체까지 이 시장을 노린다. 국내 자동차 업체인 기아차는 2014년 제네바모터쇼에서 콘셉트 전기자전거 ‘KEB’를 선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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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튬-망간 배터리와 허브 모터를 탑재했다. 완전 충전 시 최대 40㎞ 를 달릴 수 있고 접이식이라 자동차에 싣기가 편하다.

전기자전거의 대당 평균 가격은 100여만원이지만 수천만원에 팔리는 프리미엄 제품도 많다. 기업들이 미래 먹거리로 관심을 보이는 이유다. 특히 전기차를 생산하는 자동차 업체는 이미 모터와 배터리, 차체에 쓰는 프레임 기술이 있어 쉽게 제품을 개발할 수 있다.

‘세계전기자전거보고서(Electric Bikes Worldwide Report)’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판매된 전기자전거는 4007만 대다. 특히 중국은 최근 수년간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며 최대 수요지로 떠올랐다. 미국 시장조사기관 ‘내비건트 리서치’는 전기자전거 시장 규모가 2013년 84억 달러(약 9조6200억원)에서 2018년 108억 달러(약 12조3700억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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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달과 모터가 함께 동력을 전달 하는 파스 방식의 자전거로 충전 시 최대 100㎞까지 주행이 가능하다.

세계 시장과 달리 국내의 전기자전거 판매는 지난해 기준 1만7000대에 머물렀다. 자전거 제조업체인 삼천리자전거·알톤스포츠, 자동차 부품업체 만도 등이 전기자전거를 만들지만 판매는 브랜드별로 연간 1000여 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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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바퀴 위에 서스펜션 포크를 장착해 승차감이 좋게 만들었다. 모터는 프레임 안쪽으로 내장했고 삼성SDI 배터리를 적용했다.

국내 수요가 정체된 이유는 제도가 시장의 성장을 막고 있어서다. 국내에서 전기자전거는 원동기로 분류되기 때문에 자전거도로를 달릴 수 없다. 일반 자동차와 뒤섞여 도로에서만 주행이 가능하다. 그나마도 16세 이상에게만 허용된 원동기 면허가 있어야만 전기자전거를 탈 수 있다. 자전거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자전거 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다. 원동기 보험엔 가입할 수 있지만 최고 속도가 자전거와 비슷한 시속 25~30㎞로 제한돼 있어 비싼 원동기 보험에 가입할 소비자가 많지 않다.

업계의 규제 완화 요구가 이어지자 정부는 지난달 30일 한 발짝 물러나 전기자전거도 자전거도로를 달릴 수 있고, 별도의 면허 없이 이용할 수 있다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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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제네바모터쇼에서 선보인 콘셉트 전기자전거. 기아차 남양연구소에서 모노코크 프레임을 개발해 적용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반쪽짜리 법안’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세계에 판매 중인 전기자전거는 파스(PAS·Pedal Assist System)와 스로틀(throttle) 방식으로 구분된다. 파스는 사용자가 페달을 밟고 모터는 힘을 보조하는 역할만 한다. 스로틀은 온전히 모터 힘만으로도 달릴 수 있는 자전거다. 입법 예고한 법은 파스 방식에만 적용된다.

행정자치부 주민생활과 이치헌 사무관은 “스로틀 방식은 ‘사람의 힘으로 구동해 움직이는 장치’라는 자전거의 정의에서 벗어나며 급출발에 대한 위험이 있어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자전거 업계는 “스로틀 자전거도 시속 25~30㎞로 속도 제한을 걸어 놓기 때문에 파스 방식과 속도 차이가 없고 처음 출발 시 시속 7㎞ 이하로 달리도록 시스템을 만들면 급출발에 따른 위험도 없앨 수 있다”고 반박했다.

자전거 업계가 스로틀 방식을 강조하는 이유는 수익성 때문이다. 보통 파스 방식 자전거가 100만원 정도고 스로틀 방식은 300만원 이상에 팔고 있다. 대신 그만큼 더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다.

국내 업체들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선 스로틀 방식 자전거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현재 자전거 업체 간 기술 전쟁 자체가 스로틀을 중심으로 벌이지고 있어서다.

알톤스포츠 이영환 주임은 “파스 방식만 전기자전거로 인정하면 지금까지 힘들게 쌓은 기술을 버리게 되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박성민 기자 sampark2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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