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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일상의 세족식 vs 일회의 세족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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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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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

세족식(洗足式·Maundy)은 ‘계명(誡命)’을 뜻하는 라틴어 Mandatum에 기원을 두는 단어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긴 가르침을 통해 섬김의 실천이라는 사명을 상징하는 기독교의 전통의식을 말한다. 흙모래가 많은 중동 지방의 환경을 상상하건대 고단한 삶의 무게를 견뎌 낸 이의 모래먼지로 범벅이 돼 더러워진 발을 닦아 주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서 민중의 지친 삶을 위로하는 것이었으리라. 낮아짐과 섬김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세족식의 참의미는 그것이 일상(日常)의 실천이 되라는 뜻이지 순간의 이벤트로 외식(外飾)해 드러내라는 의미가 아님은 분명하다.

선거를 앞둔 요즘, 갑작스럽게 광의의 세족 행동이 증가하고 있다. 섬김을 강조하려는 전략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화려한 일회성 이벤트가 등장한다. 국민의 이야기를 들어달라 애원해도 외면했던 이들이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평소 서민들의 삶과는 저 멀리 구분돼 살던 이들이 대중교통을 타기도 하고, 시장 상인들이 입에 넣어 주는 음식을 받아 먹기도 한다. 심지어 유권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읍소하며 절을 하기도 한다. 그중에는 진심을 가진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기에 모든 후보자의 행동을 무조건 비판하고 싶지만은 않다. 그러나 4년을 주기로 반짝 일어나는 현상을 오랫동안 경험해 온 우리로서는 대부분 일회성일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리라.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 법칙 중에 ‘고백효과(confession effect)’라는 것이 있다. 죄의식을 마음속에 품고 있을 때 선행을 더 행하나 자신의 죄를 고백한 뒤 죄의식이 가벼워지고 선행이 오히려 줄어들게 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즉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식과 부채의식이 적절히 존재할 때 선한 행동을 유발하는 동인으로 작동하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합리화하는 순간 선행 동기가 역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선거전략으로서의 수많은 형식적 이벤트를 보노라면 후보자들이 국민을 향한 부채의식과 죄책감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을 오히려 이벤트를 통해 털어 버리고 해소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즉 4년에 한 번 일회성으로 과도한 ‘섬김’을 함으로써 오히려 섬김의 일상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선거운동을 통해 충분한 섬김을 다했다고 착각하며 당선 이후의 무책임함을 정당화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선거운동은 정치인들이 앞으로 4년 동안 국민에 대한 책임감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씻김굿이 아니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과 영혼이 부재한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국민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간직하고 지속적으로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는 일관된 모습의 정치인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섬세한 양심을 가진 정치인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언정 프로이트적으로 표현하면 이드(id)적 승부 본능을 추구하는 이의 당선 쾌감을 만족시켜 주는 것은 성숙한 민주주의의 역할이 아니다.

좋은 지도자라면 그러한 빚진 마음 위에서 고도의 공감 능력을 가지고 국민의 깊은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느낄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이다. 다른 이의 신발을 신는다는 “be in one’s shoes”라는 영어 표현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공감을 뜻하곤 한다. 일반적인 공감 능력이라면 타인의 신발을 한 번 신어 보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좋은 정치인의 공감 능력이라면 그 신발을 한 번 신어 보는 수준을 넘어 그 신발을 신고 멀고 거친 길을 함께 걸으며 국민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의 무게를 짊어진 발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수준의 길고 긴 여정의 공감이 아닐까.

4년에 한 번 이벤트로 벌어지는 섬김은 정중히 거부한다. 그 과도한 이벤트는 오히려 4년을 공허하게 만드는 합리화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당선 이후에도 일관될 수 있는 섬김이라면 화려하지 않은 수수한 진심으로 충분하다. 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일상(日常)의 세족식인가, 일회(一回)의 세족식인가.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