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미래] 藥에 시계를 달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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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7면

서울 서초동에 사는 김병호(63.가명)씨는 전립선 비대증 환자다. 예전에는 하루에 세번 꼬박꼬박 약을 찾아 먹어야 했으나 요즘은 화이자에서 만든 처방약 덕분에 아침나절 한번으로 족하다. 김씨는 "깜빡하고 빼먹으면 괜히 찜찜하고 통증도 뒤따랐는데 이젠 아침에 한번만 먹으면 돼 사회생활에 자신감이 생길 정도"라고 말했다.

시간맞춰 약먹는 시대가 가고 있다. 좀더 강력한 약효를 내도록 조작하는 약물전달시스템(DDS) 등 첨단기술이 발달하면서, 약효의 지속시간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약물에 시계를 달아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씨의 전립선 비대증이나 고혈압 등 알약으로 먹는 치료제에도 하루 한번 복용에 약효를 24시간 지속시키는 기술이 숨어 있다.

원리는 이렇다. 물 분자만 통과가 가능한 반투막 껍데기에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구멍을 레이저를 이용해 뚫는다. 이 약이 생체 내에 들어갈 경우 캡슐 안의 높은 농도 때문에 반투막을 통해 물 분자만 캡슐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그러면 약물을 떠받치고 있던 고분자 물질이 서서히 팽창하면서 품고 있던 약물을 미세한 구멍으로 밀어낸다. 이 고분자 물질은 24시간 동안 계속 팽창하면서 약물을 방출, 약효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광주과기원 신소재공학과 변영로 교수는 "원래 독성이 강한 항암제가 인체 내에서 갑작스레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개발된 기술인데 최근에는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경구용 약품(먹는 약)에 적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먹는 약은 소화기관을 통과하는 만큼 하루 이상을 지속시키기 힘들다. 그러나 주사약 제제는 이보다 약효 지속기간을 더욱 늘릴 수 있다. 몸 안에서 완전히 분해되는 고분자 물질(예를 들면 PGA)을 이용한 미세소체(Microsphere) 기술이다.

변교수의 경우 직경 0.08㎜의 미세소체에 레티노익산이란 물질을 집어넣어 최근 독성실험을 진행 중이다. 레티노익산은 머리나 목 부위에 생기는 두경부암의 재발을 방지해주는 약효를 지니고 있는데 몸 속에서 너무 빨리 분해돼버리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미세소체는 레티노익산을 서서히 방출하면서 약효를 수개월 이상 지속시킬 수 있다는데 착안했다.

매일 약을 복용해야 했던 정신분열증 환자를 위해, 한차례 주사한 약효가 2주 이상 지속되는 미세소체 약물이 나왔다는 외신 보도도 최근 있었다.

약물을 서서히 내뿜는 기술은 흔히 파스라고 부르는 패치에도 응용, 피임제로 개발됐다. 먹는 피임약의 경우 매일 복용해야 했으나 1주일에 한번 3주 연속 팔뚝이나 엉덩이, 배꼽 옆에 붙임으로써 먹는 피임약 효과의 99%를 발휘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배란을 억제하는 프로게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을 패치 내 고분자물질에서 서서히 방출시키는 기술을 도입한 것이다. 올 연말께면 국내에도 시판될 예정이다.

몸 속에 심는 의료기기에 약물을 입혀 수개월간 약효를 지속시키는 기술도 선보였다. 심장근육을 둘러싸고 있는 관상동맥이 막힐 경우 심장마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다리 부위의 대동맥을 타고 올라가 막힌 부위에서 풍선을 부풀린 다음 그 사이에 미세한 철망형태의 스텐트를 집어넣는 수술로 생명을 연장시켜왔다. 그러나 이 시술의 문제는 스텐트 철망 사이로 혈관의 내피세포가 자라면서 5~6개월만 지나면 다시 달라 붙어버리는 점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최근 나온 제품이 약물방출 스텐트다. 금속 스텐트에 주변 혈관세포의 과다증식을 억제하는 '시롤리무스'라는 물질을 입혔다. 혈액의 흐름에 씻기지 않고 6개월 정도 약물이 꾸준히 흘러나오도록 고분자막을 설계한 것이다. 고분자와 약물을 섞고 스텐트에 뿌려주면, 생체 내에서 고분자가 서서히 녹으면서 약물을 내보내는 방식이다.

삼성서울병원 심혈관조영실 권현철 박사는 "일반적인 스텐트 시술의 재협착률은 36%인데 반해 약물방출 스텐트를 사용할 경우 9%로 크게 낮춘 것으로 보고됐다"며 "몸에 이식하는 의료기기에 약물을 코팅하는 기술이 점점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플로리다대의 화학공학과 아누스 차우한 박사팀은 최근 약물이 서서히 빠져나오게 만든 콘택트렌즈를 개발했다. 약물투약 시간을 깜박하기 쉬운 녹내장 등 안과질환자에게 희소식이다.

수년 내 당뇨환자의 혈당을 자동측정하며 인슐린을 조금씩 방출하는 이식용 의료기기가 개발된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수시로 인슐린 주사를 맞을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심재우 기자

<사진설명>

녹내장 치료제와 결합, 안약을 수시로 넣을 필요가 없어진 콘택트 렌즈(그림 A). 배란억제 물질을 서서히 방출하는 세계 최초의 패치형태 피임약(그림 B). 6개월간 약물을 내보내는 관상동맥 환자용 스텐트(그림 C).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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