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3)-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76) 조용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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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위당의 이름이 세상에 떨치게된 것은 1931년 5월 이충무공의 산소가 경매 당하게 되자 동아일보에 『이충무공 묘소 경매문제』라는 피끓는 논설을 써서 전국민이 들끓어 일어나 이충무공 유적 보존을 위한 범국민적 운동을 일으키게 한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논설을 읽고 전국민이 분기하여 잠자던 애국심을 발휘하게 된 것이었다.
이어 1935년 정월부터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연재논문을 실어 일제의 말살정책으로 쓰러져가는 우리의 민족정신, 민족의 얼을 진작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동시에 그는 연희전문학교 교수였으므로 그 학교는 물론 보성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자주 나타나 민족의 얼을 불러일으키는 열렬한 강연을 하였다.
육당 최남선은 자기가 맡아보던 동아일보 논설위원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었고, 연희전문학교 교수 자리도 육당이 알선해서 취직시켜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육당과 위당은 절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이 날마다 만나서 속을 털어놓는 터였는데, 1928년 가을 돌연히 육당이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선사 편수위원이 되었다.
이것을 육당의 변절이라고 하여 세상에서 말이 많았는데, 이때부터 위당은 육당을 만나지 않았다. 지정보다도 대의가, 민족의 정기가 더 중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위당은 매섭게 절교를 해왔는데 10여년이 지난 1945년 해방되던 해 이른 봄, 뜻밖에 육당이 위당을 찾아왔다. 그때 육당은 우이동에 살고 있었고, 위당은 창동에 살고 있었다. 창동에는 벽초와 김병로가 살고 있었고, 김병로는 바로 위당 옆집에 살고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서 육당이 위당을 부르자 위당의 자녀들이 위당한테 육당이 온 것을 고하였다. 그러나 위당은 사랑방 안에 팔짱을 끼고 동그마니 앉아 있는 채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육당은 자녀들의 인도로 그 방에 들어갔으나 위당은 눈 하나 깜작거리지 않고 그냥 팔짱 낀 그자세로 똑바로 앉아 있었다. 인사도 없고 물론 말도 없었다.
육당은 옆에 있는 머리장 위에 놓인 방석을 하나 꺼내 깔고 앉았다. 그리고는 혼자서 이렇게 말하더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광경을 지켜본 위당의 따님 정낭원(현재 성신여대교수)의 증언을 그대로 쓴 것이다.
『나는 이제 죽은 몸이고 그대는 새나라를 위하여 크게 일 할 사람이니 부디 자중자애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크게 활약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나는 이 말을 그대에게 하기 위하여 찾아온 것이다』
이런 뜻의 말을 하고 위당이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자 총총히 방을 나와 돌아갔다.
위당은 이 동안 시종 입을 봉하고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더라고 한다.
대쪽같이 곧고, 금석같이 차고, 고추같이 매운 위당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낸 한 토막의 일화였다.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이 성립되자 위당은 새나라의 감찰위원장이 되었고, 반대로 육당은 반민특위에 걸려 수감되었다. 어느 날 정감찰위원장은 반민특위의 사무실을 찾아가 그 위원장에게 육당에게 관대할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이 두 사람은 이런 사이였다. 위당은 6·25사변 중에 피난을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어느 날 나는 그를 찾아 낙원동 박계양병원에서 만났다. 2,3일 뒤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하였는데, 내가 만난 직후에 납치되어 갔다고 한다.
금년이 92세인데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민족의 얼, 민족 정기의 수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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