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에 따로 노는 것 없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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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의 문제가 어느날 조의에서 승상 진평에게 물었다.
『재판은 전국에서 연간 몇건쯤 있는가.』
『잘 모르겠읍니다.』
『국고의 수지는 연간 얼마나 되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재판에 관해서는 정위가, 국고수지는 치속내사가 담당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물어주십시오.』
『만사에 제각기 담당자가 있어 맡아한다면 승상은 무얼하는가.』
『모름지기 재상의 임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 음양의 조화를 꾀하고 사계의 순환을 순조롭게하며 아래로는 만물을 잘살게 하는데 있습니다. 또 밖으로는 오랑캐와 제후를 진무하고 안으로는 백성을 다스려 뭇관리들이 제각기 제 일을 다하게하는데 있읍니다.』
『과연 좋은 말을 했도다.』
이렇듯 자리에 따라 할 일이 있다.
치속내사가 부하의 일만 생각해서도 안되고 승상이 재판건수까지 신경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소잡는덴 소칼을, 닭잡는덴 닭칼을 써야 모든 일이 순조롭다.
정교한 톱니바퀴 같이 맞물고 돌아가는 이 거대한 다원사회에 어찌 승상의 손길이 다 미칠수가 있는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제가끔 제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분위기를 잡아주는 것이 근본이다.
그런 축의 역할이 없으면 각 톱니바퀴는 부지런히 돌아도 서로 조화가 안돼 사회가 어딘가 뻑뻑하고 삐걱거리게 되는 것이다.
각부문의 선의 총화가 반드시 전체의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악이 될수도 있다.
지난 총선을 치르고 보니 세상사에 막힌데가 많았음이 잘 드러났다. 집권당에선 그동안 그토록 열심히 했는데 그걸 몰라준다는 말도 나왔다.
확실히 열심히들 했다. 무슨 대회도 열심히 열었고, 유니폼 입고 교육도 열심히 했으며, 학원이나 재야문제도 열심히 피했다.
그러나 국민들이 바란것은 그런것이 아니었기에 그토록 세찬 신당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 재판건수나 국고수지는 휑하게 꿰뚫어도 제사의 조화나 인심의 순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재정적자를 줄인다고 추곡수매가를 동결하자는 소리가 나오면 『농사는 천하지대본인데 갑자기 그렬수 있느냐』, 공무원 봉급을 묶겠다면 『평소 의식주가 핍박하면 제대로 나라일을 볼수없는 법이다』, 택시합승 금지조치가 나오면 『비싼 기름 사다 쓰면서 합승은 왜 막느냐』, 과외공부 처벌에 대해선 『자식공부에 욕심좀 냈다고 그런데 세무조사를 동원해서쓰느냐』, 세수때문에 봉급자 감세를 못한다하면 『중산층을 키워야 사회가 안정되니 좀 어렵더라도 성의로 조금 깎아주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제동을 걸어주길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게 바로 막힌데를 뚫고 굽은데를 바로 잡는 것이다.
정교하고 과학적인것 같은 수자놀음에 같이 빠져 들다보면 앞뒤가 안맞는 장단에 춤을 추고만다.
건전 재정을 한다고 정부 예산은 잔뜩 줄여 놓으면서 무슨 기부금인지, 성금인지를 거둬서는 더 질탕하게 잔치를 벌인다.
잔치판이 벌어지면 어느 주머니에서든 돈은 나가게 마련인데 그것은 그대로 두고 추곡수매가나 공무원 봉급만 내핍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국제수지 개선을 강조하면서도 뭇손님 다치르고 온갖 호사 다한다. 한자리 물가시대에 웬손들은 그리 큰가.
경제의 세마리 토끼는 저절로 잡아지는 것이 아니다. 쓰고 싶은것, 하고 싶은 것을 참아가용자원을 늘리고 그걸 생산적인데 써서 계속 물려가야 지속성장·물가안정·국제수지 개선을 이룩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모두 한축에서 돌아가는 일들이다. 그런데 그게 어딘가 연결되지 않고 따로따로논다. 정위나 치속내사만 많고 재상은 나서지 않는 탓이다.
요즘 큰 파란의 불씨가 되고있는 국제그룹 건만해도 그렇다. 수출을 맡는 부서에선 열화같이 수출을 독려하니 시설을 늘렸고, 해외건설을 맡는 부서에선 해외수주를 늘리라니 덤핑도 했고, 여신관리를 맡는 부서에선 대형빌딩은 그대로 짓게하면서 은행채를 줄이라하니 단자채로 잔뜩 바꿔놓았는데 완매규제와 신발불황이 한꺼번에 닥치니 허약체질에 하중을 감당못해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아직도 헷갈리는 일들이 너무 많다. 수입 자유화를 서둘러야 하고 국제수지가 좋아졌다고큰소리친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최근 강도 높은 국제수지 방어대책이 나왔다.
또 은행 자율화를 한다고 시은 주식들을 서둘러 팔아놓고 부실기업 정리나 임원 인사하는걸 보면 옛날이나 꼭 같다.
국영기업의 자율경영을 보장한다며 법을 제정하고 이상한 기구까지 만들어 놓고 낙하산식인사는 여전하다.
말과 행동이 다른덴 무슨 불가피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걸 납득시켜야하는데 시침 딱떼고 있으니 불신풍조가 높아지는 것이다.
모두들 자기분야에선 열심인것 같은데 그것들이 서로 조화가 안돼 헛바퀴만 자꾸 둘리고 있는 격이다.
지금 우리경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일의 근본을 바로 잡아 제가끔 제 일을 하도록하는 것이다.
경제의 고질은 무슨 금리나 환율이나 조처같은 것으로 고쳐질 정도가 아니다.
숫자놀음에서 벗어나 상식과 순리가 통해야 한다. 선거를 그렇게 비싸게 치르고 통화가 안늘었느니, 안정기조가 정착되었으니 하고 우기는건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미 터져버린 국제를 비롯해서 잔뜩 곪아있는 부실기업 문제는 숫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지수로 나타난 한국경제는 여전히 장밋빛이다. 나쁜건 없는걸로 하려하니 선거때 신당바람이 불듯 한꺼번에 일이 터지는 것이다.
숫자만 믿을 것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이 어떤가를 피부로 느끼고 기를 고르게 해주는 일이 급하다.
그것이 바로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이다.
마침 총리와 집권당대표가 바뀌었으니 한번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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