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2)-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75) 조용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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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위당 정인보는 1893년 서울 종현(명동성당 부근)에서 정난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경시, 자는 경업, 호는 수파·미소산인, 담원·위당 등이 있는데, 흔히 위당이란 호로 통하였다. 위당이란 아호에 대해서는 그의 수제자인 동교 민태직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위당은 벽초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어느 날 벽초가 위당한테 좋은 아호를 지어주마고 하면서 위악당이라고 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그 때는 호를 많이 갖는 때인데, 듣기에 괜찮으므로 낙원 이외에 그렇게도 써볼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본즉 위악당을 거꾸로 읽으면 당낙위, 즉 당나귀가 된다. 정씨 성을 놀리느라고 부르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알고 깔깔 웃으면서 이왕 그렇게 지었으니 가운데서 「악」자를 빼고 위당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 뒤로 위당이란 호를 많이 썼다고 한다. 용재 백악준도 창원보다 위당이란 호가 좋고 그렇게 부르고 싶다고, 『담원국학산고』의 서문에서 쓰고 있다.
정인보라고 하면 한학계의 태두로서 근대의 대학자인 운양 김윤직 이후에 그 대를 잇는 국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학자로서보다도 국학을 진흥시키고 국사를 빛내어 민족의 얼, 민족의 혼을 지키게 한 애국자로 보고 싶은 것이다.
위당의 스승은 난곡 이건방이였다. 난곡은 근대의 대시인 영재 이건창의 아우인데, 그는 위당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정인보가 내게 온 것이 열 세살 때였는데, 그때 벌써 문장과 재주가 특출해서 가르치고 배우고할 것이 없었다』고 그의 놀라운 재주를 칭찬하였다.
이즈음 『요강』이란 제목으로 지은 시에 『동산사새난문조 수국중통불견홍』(구리 산이 사방을 막았으니 새소리를 듣기 힘들고, 물나라가 가운데 통했으니 기러기는 볼 수 없도다)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때 시의 제목은 『요강』이고, 강운은 「홍」자여서 열서너살 짜리 동학들이 모두 어려워 쩔쩔 매고 짓지 못하고 있었는데, 위당은 즉석에서 이렇게 지어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것이다.
위당은 난곡을 깊이 존경해서 늘 「난곡장」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였는데, 어느 때 난곡 이건방이 서울에 올라와 일을 보러 다니다가 우연히 한길에서 위당을 만났다. 스승을 만난 위당은 대로상이건만, 그리고 그때 비가 와서 땀이 질었건만 이런 것을 불구하고 큰 길바닥에 꿇어앉아 스승에게 절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1911년 벽초와 동행으로 상해에 가서 동제사를 만들고 신규식·박은직·신채호와 더불어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왔는데, 이것을 전우해 세 번이나 상해를 왕복하였다고 한다. 최후로 상해에서 돌아온 것이 1918년이었는데, 그것은 부인 성씨가 별세하여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귀국한 것이었다. 그때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듬해에 발족한 임시정부의 요직을 맡아 그의 일생의 방향이 바뀌어졌을는지도 몰랐다.
그는 운양 같이 글을 잘 짓고 잘 읽고 잘 쓸 줄 아는 한문학의 대가여서 이것만으로도 유명하였지만 이것 외에 교육·언론·저술에 크게 활동하여 이 길에서 그의 진면목을 발휘하였다.
1925년 벽초가 시대일보 편집국장이 되자 그를 따라 논설위원으로 입사하였고, 다시 자리를 옮겨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날카로운 필치로 총독정치를 비판하였고 민족의 정기를 항상 일깨워 주는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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