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백가쟁명:유주열] 요깡(羊羹)과 카스텔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최근 몇 년간 한일 관계가 안 좋다고 하지만 일본을 찾는 한국인이 꾸준히 늘고 있다. 2015년도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이 400 만 명인데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은 그 절반도 안 되는 180만에 그쳤다. 한일 양국의 인구를 고려하면 한국인의 일본 방문이 압도적으로 많은 셈이다.
어쩐지 주변에 일본 그것도 규슈(九州)에 다녀 온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무엇이 한국 사람들을 끌어당기는가. 나가사키를 다녀 온 어느 지인은 비싸지 않으면서 깔끔하고 맛있는 음식과 많은 볼거리에 만족한다고 하였다.
2차 대전 시 히로시마와 함께 원폭이 투하된 도시라 하지만 활기에 차 있고 특히 푸치니의 오페라에 나오는 ‘나비부인(蝶蝶夫人 Madama Butterfly)’이 살던 글로바 정원을 가 본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오래 전 일본에 근무할 때 나가사키의 글로바 정원을 다녀 온 기억이 난다. 글로바 정원은 스콧트랜드 출신의 무역상 토마스 글로바( Thomas Glover 1838-1911)의 저택이다. 글로바는 1859년 나가사키가 조약항(treaty port)으로 개항되면서 이곳에 자리 잡아 일본의 비단 수입부터 총기류 판매까지 무엇이든지 거래하였다.
언젠가 일본 친구로부터 일본이 근대화를 이룬 메이지(明治)유신의 성공은 글로바 무역상이 나가사키에 들어왔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50 여 년간 일본을 지배해 온 에도막부(江戶幕府)를 무너뜨리고 왕정(메이지 천황)을 복고시킨 것은 서(西)일본의 젊은 지사들이 막강한 도쿠가와(德川) 막부군에 대항 무력으로 싸워 이긴 결과였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인 젊은 지사들에게는 글로바 무역상으로부터 비밀리 구입한 신무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1860년대의 미국은 남북전쟁 중이었다. 미국의 무기제조업체들은 남북전쟁이 오래 갈 줄로 예상하고 많은 신무기를 만들어 두었다. 장전된 총알을 연발로 쏠 수 있는 윈체스타 연발총이 당시의 신무기였다.
생각보다 빨리 남북전쟁이 종결되자 무기상들은 넘치는 재고 처리를 위해 동아시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일본의 내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글로바 저택에 가보면 무기구입 협상의 현장을 보존해 놓아 당시를 상황을 느낄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에 도움을 준 글로바는 죽고 그의 일본 부인과 사이의 혼혈 아들 글로바 도미사부로(倉場富三郞)가 글로바 무역회사를 이어받았다.
근대화의 우등생인 일본이 군국주의로 변신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침략하자 영미(英美)와 전쟁이 불가피 하였다. 군국 일본에게는 영국계의 글로바 회사가 눈의 가시였다. 특히 나가사키 항을 굽어보는 글로바 저택이 문제였다. 당시 일본은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비밀리에 전함 무사시노(武藏)를 건조하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전함 건조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도미사부로를 스파이 명목을 걸어 그의 저택에서 쫓아냈다. 그 후 도미사부로는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연합군을 배신하고 적극적인 친일로 돌아섰다. 일본의 패전은 글로바 도미사부로를 전범으로 처리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 도미사부로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전범으로 체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목메어 자살을 하였다고 한다. 도미사부로는 나가사키 외국인 묘지의 아버지 토마스 옆에 묻혔다.
‘나비부인’의 원작자인 미국인 존 롱( John Long)은 나가사키에 간 적이 없고 나가사키에 사는 누나를 통해 들은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이라고 한다. 1904년 이 소설을 오페라로 무대에 올린 푸치니 역시 나가사키에 간적은 없다.
그러나 나가사키에서 가장 전망 좋은 글로바 저택에 나비부인이 미국의 해군장교 핑커튼과 신혼 생활을 한 곳으로 상상되어 글로바 저택을 나비부인의 집으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기가 끝난 핑커톤이 미국으로 돌아 가 새로이 결혼하는 등 나비부인도 결국 핑커튼에게 배신을 당한다. 크게 실망하여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나비부인은 유일한 자식을 남겨 두고 자살로 끝을 맺는다.
높은 언덕위의 글로바 저택도 나가사키의 원폭의 피해를 입었다. 나가사키는 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원자폭탄이 떨어져 7만 명 이상의 생명이 희생된 곳이다. 나가사키는 원폭 투하의 일차 대상 지역이 아니었다.
‘팻맨(Fat Man)’이라는 원폭을 싣고 괌을 출발한 미국의 B29 폭격기는 야하타(八幡) 제철소를 중심으로 하는 고쿠라(小倉) 등 북(北)규슈의 공업지대에 원폭을 투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상공에 잔뜩 낀 구름으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투하를 포기하고 오키나와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였다는 것이다. 일기가 운명을 바꾼 순간이었다.
나가사키에는 과거 포르투갈 선교사, 네덜란드의 상관이 있어 카스텔라, 덴뿌라가 여기서 발상되는 등 서양과 깊은 관계가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과도 인연이 깊다.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우동(??) 요깡(羊羹) 만주(饅頭) 등 중국의 고유 음식이 불교 전래와 함께 중국(宋)의 스님을 통해 들어 왔다고 한다. 1570년 경 나가사키항의 전체 인구가 3만 정도였을 때 중국인이 1만 명이었다고 하니 나가사키는 일본 속의 중국 도시였다.
나가사키에는 서양식 성당과 함께 중국식 절, 그리고 중국인이 타국에 세운 유일한 공자를 모신 사당 공자묘(孔子廟)도 있다. 또한 나가사키 신치(新地)의 주카가이(中華街)는 일본 3대 차이나 타운의 하나이다.
유명한 나가사키 짬뽕이며 중국식으로 라운드 테이블에 둘러 앉아 식사하는 싯포쿠(??)요리도 중국에서 온 것이다. 사각으로 자른 돼지고기를 부드러운 빵 속에 끼워 먹는 일본식 ‘돈포로우(東坡肉)’는 싯포쿠 요리에 빠지지 않는다.
나가사키와 중국(淸)과의 관계에서 종종 나가사키 ‘청국수병사건’이 거론된다. 1886년 7월 청조(淸朝)는 딩위안젠(定遠艦) 등 4척의 최신식 북양함대를 한반도 원산에 출동시켜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견제하였다. 북양함대는 귀로에 연료보급을 위해 나가사키에 기항하였다.
이 때 북양함대의 선원 500 여명이 허가 없이 나가사키에 상륙하여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아시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는 북양함대의 수병들은 후진국 일본을 업신여겨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을 모욕한 청국수병사건이 몇 년 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국에게 승리한 동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