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7) -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70)|암흑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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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즉시 북경을 점령하고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한구로 이전하였다가 다시 이듬해 1938년 멀리 중경으로 천도하였다. 그동안에 독일의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합변해버리고 이듬해 1939년에는 폴란드를 침공해 마침내 제2차세계대전을 터뜨렀다.
이듬해인 1940년에는 「히틀러」의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여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일본은 소위 대동아신질서 건설방침을 발표해 영·미두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방침을 굳혔다.
1930년대를 지나 1940년대에 들어섰을때의 세계정세는 이같은 폭풍우속에 들어있어 내일이 어떻게 될는지, 어느나라가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 공포의 소용돌이속에 들여있었다.
우리국내로 말하면 남총독이 1936년부터 오랫동안 총독의 자리에 앉아있어 조선사람을 들볶아대는 갖은 학정과 폭정을 마음대로 하고있었던 것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다.
농사지어 얻은 곡식은 일본으로 가져가 다 빼앗기고, 젊은 장정은 지원병이나 징용으로 뺏기고, 금붙이·쇠붙이는 전쟁물자로 쓴다고 뻣기고, 말도 성명도 뺏기고, 부녀자는 방공훈련, 배급줄서기에 정신없고 이리하여 우리네 생활은 말할수 없는 도탄의 진흙구렁텅이 속에 빠져있었다.
우리들이 이렇게 불안과 공포속에서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는중에 천운이 도운탓인지 1941년 무모하게도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을 본 우리 지식인들은 일본의 패망을 예측하고 우리의 앞길에 큰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의 해방을 알게된것은 2년뒤인 1943년11월 미·영·중 3국의 원수가 카이로에 모여 일본항복후의 전후처리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결정한것을 세계에 선포한 카이로선언을 읽은뒤부터였다. 그 선언에서 3대국은 『조선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맹세코 조선을 자주독립시킬 결의를 갖는 것』이라고 분명히 조선의 독립을 약속하였던 것이다.
이 카이로선언의 내용이 일본신문에는 게재되었지만 총독부에서는 일본신문을 전부 압수해 조선에는 한장도 못들어오게 하였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다 알고있었고 이때쯤되면 유럽에서는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을 감행하였고, 일본이 마리아나 해전에서 대패해 「히틀러」의 항복이 목전의 일이 되고 일본도 패망할 날이 가까와 온것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일은 남총독이 극성스럽게 우리네를 들볶던 30년대의 최후인 38, 39년께만해도 전연 예상치 못했었다. 38, 39년께는 칠흑의 암흑시대여서 우리는 앞일이 어떻게될지 모르고그냥 목숨을 이어 갈뿐이었다.
이런 절망과 암흑의 시대에 있어 대쪽같은 절개와 금석같은 굳은 의지와 맵고 뜨거운 기백으로 우리민중들의 정신적인 지주, 마음속의 방침대가 되어온 지도자가 몇분 있었다.
여기서는 정치이야기는 안하기로 되었으므로 정치관계자들은 빼놓고 그밖에 당시의 교육계·언론계·문화계를 통들어 우리민중들의 사표로, 또는 마음속의 받침대로 은연히 숭앙받아 오던 몇분의 행적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기로 한다.
그중에서 교육자로서는 인촌 김성수, 언론인으로서는 민세 안재홍, 민족의 얼(혼)을 일깨워 온 위당 정인보, 그리고 문화계의원로로 널리 존경을 받아오던 위창 오세창-. 나는 50년전인 1930년대를 회상하면서 이 네분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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