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성찬」되새김 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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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국민의 눈과 귀와 발길이 온통 유세장으로 옮겨간 열흘이었다.
엄청난 수량의 말들이 봇물처럼 터지고 홍수가 되어 흘렀다. 유세장마다 야당후보들이 하나같이 매도해 마지않던 「언론의 자유」 는 바로 그 후보들에 의해 원 없이 구가되었다. 유세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도 오랜만에 모처럼의 정치얘기로 열기를 돋우었다. 박수를 치고함성을 지르고 야유를 보내면서「정치」를 만끽하고 포식했다. 지역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나선 후보들이 허언과 중상·모략·비방도 서슴지 않았다.
너나없이 자기 외에는 모두 부도덕하고 형편없고 사악한 사람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여야가 짝 갈라져서 아직도 허다한 문제와 고민과 치부를 감추려하고 혹은 자기들도 숨쉬고있는 이 땅덩어리를 「사람 못 살 곳」으로 매도했다. 이 나라가 금방 지상낙원이라도 될 것처럼 호언하는가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목숨을 내던져 민주주의낙원을 건설하겠다고 장담하기도 했다.
여야로 갈라선 응원단은 상대방후보 연설을 함성과 야유로 훼방놓고 자기 당후보 연설이 끝나면 우르르 자리를 떠 김을 뺐다. 후보와 후보를 미는 응원단이 모두 「우리편이 아니면 적」 이라는 작심을 미리하고 남의 논리에는 아예 귀를 막았고 후보들은 「말의 폭력」 도 사양치 않았다.
따져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인파와 현실이요, 열기건만 후보와 응원단의 질 낮은 판단과 착각이 개운찮은 뒷맛과 앙금을 남겼다.
곰곰 새겨보면 지난 수년동안 대중들은 서울운동장에서만, 장충체육관에서만, 프로복싱의 텔리비전 앞에서만 함성을 지르고 열을 냈었다. 그렇게 카타르시스를 하다보니 상대방을 녹아웃시키는 쾌감에 익숙해져 후보들은 그토록 이성을 잃고, 청중들은 또 덩달아 될 말 안 될 말에 쉽사리 흥분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은 아닐까.
돌이켜보면 4년 전의 11대 선거가 대부분 현역의원들의 고백처럼 「그렇게나 쉬운 선거」였기 때문에 저렇게들 여야후보간에 맹렬한 치고 받기가, 사생결단이 벌어지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런 원인과 배경을 찬찬히 살펴서 진지한 접근을 해 가는 것이 주권자들의 바람이요,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첩경일텐데 후보들과 응원단들은 그런 간단한 이치는 놓아두고 그저 진흙탕의 싸움에 급급하게 말려드는 느낌이다.
서울·광주· 부산· 경기도와 충청도의 조그만 읍내 유세장에서 후보들이 토해놓은 그 엄청난 소리들과 뜨거운 열기들은 이제 서서히 안으로 찾아들고 조금씩 정리되어 며칠후면 주권자의 심판을 받겠지만 과열 유세장이 토해놓은 비 이성, 혼탁의 앙금은 아직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가야할 길이 멀고 지난한 숙제임을 개운찮은 뒷맛으로 남겨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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