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 젊었어도 내가 백주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혼자 살거나 병으로 누워있는 부인을 돌보고,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나이든 남성을 위한 요리·건강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충남 예산군 보건소가 2월부터 열고 있는 ‘독거 남성 무료 집밥 요리교실’이 그것이다.

기사 이미지

지난 17일 충남 예산군 삽교보성 보건진료소에서 혼자 사는 노인을 비롯한 할아버지들이 닭볶음탕·계란말이·감자볶음 등 요리를 만들며 즐거워 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17일 오전 10시 예산군 삽교읍 삽교보성 보건진료소. 앞치마를 두른 남성 10여 명이 도마·칼 등 조리기구가 갖춰진 싱크대 앞에 섰다. 이들은 안경자(52·여) 요리사를 따라 닭고기를 손질하고 감자·대파 등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냄비에 넣었다. 여기다 고춧가루와 소금 등으로 적절히 간을 한 다음 20 분 끓였다. 이렇게 해서 닭볶음탕이 완성됐다.

예산 보건소 7080 요리교실
삽교·덕산 2곳서 두달째 열어
고혈압 관리, 치매 예방 교육도
6월부터는 4곳으로 확대 운영

이들은 요리를 서로 나눠 먹으며 솜씨를 자랑하기도 했다. 몸이 불편한 부인을 돌보고 있는 한상현(82)씨는 “내가 10년 만 젊었어도 백종원(‘백주부’로 불리는 방송인)이 울고 갔을 겨”라며 활짝 웃었다. 김종혁(70)씨는 “형님 요리사 혀도(해도) 되겄슈”라며 맞장구를 쳤다. 이들은 남은 음식은 들고 집으로 향했다.

기사 이미지

할아버지들이 안경자(52·왼쪽)요리사에게 요리를 배우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이 요리교실은 지난 2월 18일 시작됐다. 예산군보건소가 혼자 사는 남성들이 제대로 된 식사를 못해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고 판단해 마련했다. 된장·김치찌개, 콩나물김치밥, 오징어 볶음, 소고기 미역국, 도토리묵밥, 제육볶음, 잔치국수 등 집에서 쉽게 해먹을 수 있는 요리를 가르친다. 또 요리 강의에 앞서 건강관리도 한다. 고혈압·당뇨관리법이나 암·우울·자살·치매 예방교육도 한다.

임순희 삽교보성 보건진료소장은 “혼자 사는 노인 중에 할아버지가 많은 데 이들은 대부분 부실한 식사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다”며 “식사라도 맛있게 해 드시면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산지역 65세 이상 노인 2만1607명 가운데 1497명(6.9%)이 독거 노인으로 조사됐다.

부인과 사별하고 7년째 혼자 살고 있는 인지식(72)씨는 “노인들이 모여 요리도 하고 대화를 할 수 있어 너무 즐겁다”고 말했다. 4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부인(67)과 살고 있는 이두호(81)씨는 “집사람이 ‘요리강좌를 다녀온 뒤로 요리솜씨가 몰라 보게 좋아졌다’고 칭찬해 주니 요리 교실이 기다려진다”며 “칼로 감자 등을 썰 때 두께 조절하는 법 등 세밀한 부분까지 배웠다”고 했다.

요리교실 수강생은 20명 정도다. 대부분 70·80대 혼자 사는 할아버지이며, 병으로 누워있는 부인을 돌보는 할아버지도 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빈혈 등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요리교실은 삽교보성·덕산 나박소 보건소 등 2곳에서 다음달 25일까지 매주 한 차례씩 열린다. 이어 6월부터는 다른 보건소 2곳에 추가 개설된다. 보건소 측은 200여 만원을 들여 조리기구를 장만했다. 또 강의 때마다 음식재료를 준비한다. 노인들은 준비물 없이 가서 요리를 배우기만 하면 된다.

김방현 기자 kim.banghy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