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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사람들 넘치는 제네바행 열차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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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호 29면

파리 국제도서전 참석 중에 잠시, 제네바에 사는 필자를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탔다. 옆자리에 앉은 모자의 모습이 신록이 점점히 찍힌 창밖 풍경 위에 겹쳐 정겹다. 지루한 시간을 엄마는 책을 보고 아이는 공책에 그림을 그리면서 견디고 있다. 앞 뒷자리를 부러 둘러 보았다. 자리마다 스마트 기기에 전기를 공급해주는 장치가 있지만 책이나 잡지를 들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이 때문에 분주한 새댁과 피곤해 잠이 든 아저씨 뿐이다. 지하철보다 장거리를 이동해서 그런지 종이 위의 글자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책을 파는 입장에서 이런 풍경은 부럽다. 어찌되었든 책을 사서 보고 있는 것 아닌가? 책이나 신문, 그리고 잡지와 같은 올드 미디어를 이만큼 소비하는 시장이라면 책장사를 할 만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이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이 없는 것은 아니다. 뉴미디어를 들고 무언가를 보거나 게임을 하다가도 다시 올드 미디어로 돌아간다. 한번 시작하면 끝내기 어려운 뉴미디어의 유혹을 어떻게 떨쳐내는 것인지 자못 궁금했다.


뉴미디어는 올드 미디어에 비해 반응이 빠르고 자극적이다.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것이 아이들을 얼마나 오랜 시간 잠잠하게 하는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눈을 파고 드는 자극은 위협적이다. 사람은, 그리고 사람의 눈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을 뚫어지게 보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디어 위의 그림이 움직이고 소리까지 내서 오감을 자극하니 거기서 눈을 돌리는 것은 여간한 결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인터넷에 연결된 도구는 또 다른 방식으로 헤어나지 못하도록 붙잡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링크들과 반복적으로 ‘추천’이라며 올라오는 단어들을 벗어나기 어렵다.


가끔은 짜릿한 자극에 몸을 맡기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돌아와 반성적인 시간을 가질 수 없다면 정신의 배터리는 방전되고 황폐해 질 수 밖에 없다. 올드 미디어는 적절한 자극을 주면서 상상력의 여지를 열어두어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뉴미디어에 비해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옆으로 새지 않고 한권의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이 가지는 미덕은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인간 정신의 도전을 함께 걸어보면서 다른 도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을 준다는 것이다.


제네바행 열차의 아이나 어른들이 유혹을 떨치고 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교육과 훈련의 힘일 것이라 짐작한다. 마침 교육부에서 2018년까지 국어 교육과정을 ‘한 학기 책 한 권 읽기’로 개편한다고 한다. 교과서에 모아져 있는 쪽글들만 읽지 않고 한권의 책을 정해서 긴 호흡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고민을 한 모양이다. 예상되는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개편에 찬성하는 이유는 짧은 글들에만 기대어 지식을 얻는 방식으로 교육한 것이 우리 아이들을 뉴미디어의 유혹에 더욱 취약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성취를 위해서 지루함을 참고 능동적으로 텍스트에 도전해 본 경험이 주는 즐거움을 기억한 사람이 에너지를 잃지 않고 자극적인 세계를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국제도서전이 열리고 있는 파리는 오래된 제국의 수도이다. 그들 대부분 그러하듯이, 인류가 이뤄낸 지적· 예술적 유산이 많다.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혹은 빼앗고 약탈한 유산들이 한가득이고, 그것을 아름다운 건물들에 잘 보관하고 있다. 권위의 상징인 왕궁, 무력을 키우는 군사학교,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온 물건과 지식들을 지배하는 미술관· 박물관·도서관들을 파리 지도 위에서 연결해 보면 강고했던 제국주의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그늘이 커서 그런지 도시엔 수백 년의 시간이 함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의 시간도 모두 다르게 간다. 빠름과 느림이 함께 있다.


빠른 속도가 휘몰아치고, ‘지금’만 있는 서울에서 온 나는 모든 것이 불편하다. 고장난 엘리베이터, 느린 인터넷, 좁은 도로, 대답없는 웨이터, 담배 냄새 솔솔 들어오는 식당. 하지만 뉴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책 읽는 사람이 많은 것은 반갑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파리국제도서전에서도 놀란 것은 독자들의 열기였다. 한국에서 어떻게 독자들을 늘릴 것인가 고심하던 차에 만난, 도서전에 몰린 인파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쓸어 버리고 새로 짓는 것에만 몰두한 결과가 놀라운 압축 성장을 이루었지만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장점을 모두 취하기 어렵게 만든다. 다른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한 방향으로 모든 것을 몰고가는 사회가 책도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의 미래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몸을 싣고 있는 시간의 속도를 조절해야 할지도 모른다. 섣부른 독서 진흥보다 시급한 것은 다른 시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허용할 관용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책을 다시 찾기만 한다면 고루함에 대해서는 기꺼이 비난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


주일우문학과 지성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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