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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 극의 충돌, 그것이 인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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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호 8 면

조세 몽탈보

김미애

한국 전통춤이 프랑스의 예술 감각을 덧입는다. 한국무용의 동시대성을 모색하는 국립무용단이 곧 선보일 ‘시간의 나이’(3월23~27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를 지휘하는 사람은 영상과 무대가 교감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한 프랑스의 국민안무가(62)다. 2014년 핀란드 안무가 테로 사리넨과 협업해 세계무대 진출에 성공한 ‘회오리’에 이어 국립무용단이 야심차게 기획한 두 번째 해외 안무가 프로젝트다.


당초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은 프랑스 국립극장 중 유일한 무용중심극장인 샤요극장의 상임안무가 몽탈보를 초청해 이 프로젝트를 독자적으로 기획했다. 그런데 ‘한불 상호교류의 해’와 맞물려 샤요극장과 공동제작으로 발전됐다. ‘한국 내 프랑스의 해’ 개막작으로 선보인 후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내 한국의 해’ 폐막작으로 공연될 예정이다(6월16~24일 샤요국립극장).


몽탈보는 세계적인 안무가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진 현대무용가다. 기상천외한 발상이 담긴 영상과 음악을 활용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동화속 이미지를 무대 위에 구현해 낸다. 베르사유 정원에서 동물과 인간이 뒤섞여 뛰놀고, 지친 현대인들이 파리 지하철에서 돈키호테를 만나는 식이다.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높아 그의 신작은 나올 때마다 화제를 모으며 각국의 초청을 받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몽탈보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도전이다. 발레·플라멩코·탭댄스·브레이크 댄스 등 온갖 장르와의 크로스오버를 해온 그로서도 동양의 고전무용과의 협업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춤’으로 알려진 한국무용에 그는 어떤 날개를 달아줄까.와 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44)를 만났다.

‘시간의 나이’ 무대 리허설


11일 오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 ‘시간의 나이’ 리허설이 한창이다. 국립무용단 단원들이 캐스터네츠 같은 리듬악기 향발로 특유의 비트를 넣으며 ‘볼레로’ 멜로디를 따라 불렀다. 여기에 바라, 장구 등이 더해지면서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볼레로’의 기운이 재현되는 듯 했다. 독특한 것은 무용수들끼리 줄기차게 토론을 한다는 점. 몽탈보는 대체로 멀리서 지켜보다 가끔씩 끼어들고 있었다.


환갑이 넘었다지만 훤칠한 키에 날렵한 몸매의 이 남자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시종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안경 너머로 문제를 예리하게 꿰뚫어보는 듯한 ‘포스’도 심상치 않았다. 건축과 미술사 전공자답게 모호한 감성을 앞세우기보다 수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철저히 계산된 무대를 만들고 있음이 느껴졌다.


“무용수들에게 동작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무용수들이 스스로 춤을 만들어 내는 걸 보고 싶다”는 그는를 뮤즈로 치켜세웠다. “내 생각을 잘 소화해주는 무용수입니다. 무용수이자 안무가로도 창작에 참여하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에요. 한국 춤을 잘 몰랐지만 그의 몸짓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안무를 짜게 됐습니다.”(몽탈보)


“통찰력이 엄청나세요. 무용수의 장단점을 다 꿰뚫고 있죠. 초기에 저와 장현수 선배에게 즉흥을 해보라더니, 두 시간 동안 혼자 즐기다 끝내더군요. 그때 우리가 가진 걸 다 파악해 버린 거예요.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 등 상반된 요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보이기를 요구하는데, 그런 게 우리 춤에 다 있다더군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김)

‘시간의 나이’ 무대 리허설

‘시간의 나이’ 크로마키 영상 촬영 현장. 무용수들의 움직임만 따로 촬영해 CG로 영상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거쳤다.

“한국 전통춤에 새로운 색깔 입혀야죠” 국립무용단의 해외안무가 초청은 이번이 두 번째지만 이전과는 전혀 색다른 작업이 됐다. 첫 프로젝트였던 ‘회오리’의 테로 사리넨이 자연주의적 안무가로 우리 춤과의 유사성을 강조했다면, 화려한 영상과 연출적 요소를 사용하는 몽탈보와의 만남은 훨씬 급진적인 느낌이다. 우리 춤의 원형을 살린 채 자신만의 언어와 만나게 하는 ‘극과 극의 만남’이라 더욱 흥미롭기도 하다.


“테로가 본인 걸 우리에게 주고 거기서 한국적 정서와 자연스럽게 만나길 시도했다면, 몽탈보는 ‘제로(0)’에서 시작했어요. 우리 춤에서 변형을 시작한 거죠. 솔직히 훨씬 더 힘들어요. 몽탈보가 생각을 던지면 우리가 만들고, 그게 자기 생각과 맞아떨어지는 대목을 찾아가는 과정이거든요. 한국 춤을 현대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무척 흥미롭지만 조급한 마음도 들어요. 하지만 웃으면서 ‘나를 믿으라’네요. 자기도 우리를 믿는다면서.”(김)


“처음부터 한국 전통춤은 불확실성과 변화에 열려있는 언어라 생각했어요. 나는 이 언어를 배우고 받아들이는 위치에 있는 거죠. 그 언어를 받아들인 뒤 그 언어의 한도 내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걸 보여주려는 생각으로 왔습니다. 만일 내 안무를 배우게 했다면 무용수들이 소화해내지 못했겠죠. 우리는 서로 다른 기술을 갖고 있으니까요. 내가 원하는 건 전통춤을 익숙한 방식이 아닌 새로운 색깔을 입혀 보여주는 거예요. 공연을 본 뒤 ‘전통춤이지만 새로운 방식이다’라고 느낀다면 성공이고, 현대 혹은 전통 어느 한쪽이라 느낀다면 실패라 생각해요. 내 목표는 전통춤을 현대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니, 성공여부는 관객에게 달렸죠.” (몽탈보)


제목 ‘시간의 나이’는 몽탈보가 존경하는 멕시코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1928~2012)가 1987년 이후 자신의 작품을 ‘시간의 나이’라고 분류한 데서 영감을 받았다. 과거를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내다보라던 작가의 말처럼, 전통무용을 통해 미래적 현대무용을 창조하겠다는 뜻이다. 작품은 ‘시간의 놀이’‘꿈’‘욕망의 의식’을 테마로 전혀 다른 3장으로 나뉘지만 ‘시간의 나이’라는 큰 테마로 수렴된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1장은 봄을 열듯 생명을 주는 느낌으로 시작을 알리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전통을 처음 접해 놀이처럼 갖고 노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2장에서는 삶의 비극적 모습과 불평등 같은, 좀 더 인간의 본질에 다가가는 성숙한 파트에요.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의 다큐멘터리 ‘휴먼’의 미공개 영상을 사용해 하나의 인생이 지나가는 길을 그릴 겁니다. 3장은 삶에 대한 오마주랄까요. 라벨의 ‘볼레로’와 타악을 활용해 한바탕 축제로 마무리할 겁니다. 삶의 여러 국면을 거치면서 즐거움도, 절망도 겪는 모습을 전통과 현대에 걸쳐 보여주고 싶어요.”(몽탈보)

“몸짓 달라도 인류의 춤의 나무는 하나” 그는 이번 프로젝트가 자신에게 여러모로 ‘처음’이란 걸 강조했다. 비극적인 느낌과 즐거운 느낌을 한 작품에 섞는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많은 무용수가 적극 안무에 참여한 것도 유일하단다. 특히 ‘볼레로’ 사용은 개인적으로 큰 도전이라고 했다. “과거 유명 안무가들이 ‘볼레로’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왔으니까요. 그들의 수준에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성장했는지 시험받는 셈인데, 하나의 예술사로 이어지는 시도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죠.”


욕망과 열정의 음악인 ‘볼레로’와 우리 전통춤이 과연 어울릴까. “작품에 잘 어울리는 건 하나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휴먼’ 영상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어울리지 않는 걸 이어지게 만드는 게 훌륭한 무용수들이죠. 극과 극이 충돌하는 것, 그게 인생이잖아요. 움직이면서 다른 것들을 만나는 게 삶이라 생각해요.”(몽탈보)


“상반된 것의 공존이 키워드인 것 같아요. 놀이에서 시작해 마지막에 잔치나 축제로 끌어가고 싶다고 하면서도, 그 이면에 상반된 슬픔이 있죠. 즐거움과 슬픔의 상반된 이미지가 있고, 전통과 현대도 어우러져서 하나의 무언가를 만든다기보다 그저 같은 시공간에 함께 있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아요.”(김)

리허설 현장에 함께한 조세 몽탈보

리허설 현장에 함께한
“초현실이 살짝 윙크하는 무대 좋아해요” 지난해 샤요극장에서 공연된 국립국악원 종묘제례악을 보긴 했지만 막상 와서 보니 한국 전통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더라는 몽탈보는 유럽인에게 미지의 영역인 한국의 전통적인 몸짓과 리듬, 가락을 세계무용계에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인류가 여러 색깔과 다른 관점을 갖고 있지만 하나의 뿌리에서 파생된 것과 마찬가지죠. 다양한 인종만큼 춤에도 각자 다른 몸짓이 있어요. 전통춤을 통해 한국 고유의 몸짓을 알리게 되면 인류의 춤이라는 나무에 하나의 가지를 보태는 일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몽탈보)


“전통복식이나 장구, 북 같은 소품들이 우리 전통춤이라는 걸 보여주지만 전혀 새로운 움직임이 나오고 있어요. 예를들어 부채춤이라면 부채없이 추는 거죠. 거기에 또 속도 변화를 주면 부채춤에서 나왔어도 또 다른 현대춤이 된다는 거예요. 누가 보면 부채춤인지 모를걸요. 그가 생각하는 현대춤 자체가 그냥 새롭게 태어난 게 아니라 과거 춤을 새로운 감각으로 변형시켜요. 옛날 노래를 편곡하면 전혀 다르게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죠.”(김)


몽탈보는 현대무용계에서 영상과 무대가 초현실적 교감을 나누는 독보적인 스타일로 유명하다. 영상 속에서도 춤을 추며 무대를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그의 작품세계는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동화적 상상력이 키워드다. ‘시간의 나이’에서도 전통의상과 일상복을 입은 동일 무용수가 서로를 쫓는 장면이 연출되는 등 기발한 상상력은 그대로다.


“춤에 욕심낼 수는 없는 작업이에요. 흥미로운 장면을 만들기 위해 무용수와 영상의 비중이 거의 동등하죠. 영상 속 사람이 무대에서도 동시에 춤을 추는데, 영상에서 튀어나온 듯한 효과를 노린다고나 할까. 영상과의 싱크도 무용단 입장에선 가장 파격적인 작업이에요. 고도의 계산이 필요한 힘든 일이긴 한데 재미있어요. 아직까진 다들 눈치로 잘하고 있죠(웃음).”(김)


“무대에서 초현실이 살짝 윙크하는 걸 좋아해요. 20세기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를 자연스럽게 접하는 시대에 교육받은 영향일 테죠. 하지만 내 작품 자체는 초현실주의적이지 않아요. 초현실주의는 하나의 학회고, 앙드레 브로통이 만든 틀과 규칙을 따르는 것인데, 나는 그런 요소를 조금씩 가져올 뿐이니까.”(몽탈보)


그런 동화적 상상력이 한국춤과 어울릴까 싶지만 “몽탈보는 인간이 가진 순수성 자체에서 시작한다”는 것이의 말이다. 캐스팅 워크숍에서부터 ‘춤 춰 보라’가 아니라 ‘놀아보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저희는 무용단 연습실에 들어서는 순간 살짝 포장을 하게 되요. 춤이란 게 미적인 것이니까 그걸 표현하는 무용수로서의 자세를 덧입고 자기 모습은 잘 드러내지 않죠. 몽탈보는 그걸 다 해체시켜 버렸어요. 놀이터에서 놀 듯 서로 이름 부르며 미친 듯이 놀라고 하는데, 어떤 본질을 끌어내려는 것 같아요. 좀 민망하긴 했지만 무용수들이 서로 엮이고 싸우면서 더 정들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었어요.”(김)


“뛰노는 장면은 작품의 전체 그림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에요. 영상으로 피카소의 클래식 작품과 큐비즘을 모두 사용할 텐데, 발랄하게 뛰놀면서 전통과 현대를 허물겠다는 얘기죠. 하지만 아이들이 노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전혀 다른 분위기로 가는 영화처럼, 이 작품도 다양한 장면을 보여줄 겁니다.”(몽탈보)


그는 ‘시간의 나이’가 여러 겹을 갖고 있고 아이의 순수함과 삶의 비극을 넘나드는 복합 구조지만, 보기에 어려움은 전혀 없을 거라고 강조했다. 깊이 있는 주제도 가볍게 전달하는 게 현대춤이라는 것이다. “테오필 고티에의 ‘예술을 위한 예술’이론에 찬성합니다. 예술은 예술만을 위해 만들어진 거라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예술지상주의죠. 나도 춤을 위해서 춤을 만듭니다. 현대무용은 어렵지 않아요. 움직임 자체를 보고, 춤을 춤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몽탈보)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국립무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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