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백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올 겨울엔 유난히 눈이 많다. 27일 서울에 내린 눈은 10cm이상의 적설을 보였다.
산과 길이 모두 눈으로 덮이고 나무들도 두터운 눈꽃으로 치장하고 있다.
성당의 시인 가지는 눈온 다음날 친구와 헤어지는 마음을 진지하게 읊었다.
『눈이 개고 구름이 걷혔지만 바람이 차가우니/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길이 험할 것이다…』(雪晴雪山北風寒 楚水吳山道路難).
그때 눈속을 걸어가야 했던 사람들 못지않게 오늘 눈온 뒤 빙판길을 달리는 차들의 사고도 잦다.
그러나 눈의 맛은 산속이거나 강가가 제격이다.
당송 팔대가의 한사람인 중당의 시인 유종원의『강설』은 특히 그런 정한이 깊다.
『산엔 새도 날지 않고/길에는 사람 발길이 끊어졌다/배에 탄 늙은 어부가/홀로 강 위에서 눈을 낚고 있다』 (千山鳥飛絶 萬徑人 滅孤舟 笠翁 獨釣寒江雪)
그것은 동양화의 주제가 되곤하는 정경이다.
아름답기도하고 처연하기도한 인생의 모습이 눈경치로 펼쳐지는 것같다.
하지만 지금 쌓인 눈을 보며 예처럼 인생을 관조하는 운치에 살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차를 모는 사람은 교통사고에 신경을 쓰고 행인들은 언 눈위를 조마조마하며 걸음을 옮긴다. 두터운 눈을 치워야하는 청소원들의 고통도 짐작이 간다.
그러나 눈위에 뒹굴고 눈사람을 만들며 눈싸움을 하는 골목대장들은 마냥 즐겁기만하다.
즐거운건 농부들도 마찬가지다.『눈이 많은 해엔 보리농사가 풍작이 된다』는 옛말도 있다.
적설은 보온작용으로 한파가 닥칠 때 보리의 동상해를 막아주고 토양에 약간의 질소나 암모니아등 비료성분을 공급해준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의 농부「벤틀리」가 1931년에『눈의 결정』(Snow Crystals)이란 책을 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일화도 있다. 그 책엔 무려 6천5백종의 눈의 결정이 사진으로 나와 있다.
그런 아름다움의 과학적 추구노력은 값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눈을 보는 사람이 「마음의 눈」을 뜬다면 더 좋을게없다.
당의 장설은 눈을 두고 이렇게 읊은바 있다.
『지난해는 형남의 매화가 눈처럼 피더니/올해는 계북의 눈이 매화처럼 날린다/인생사란 변천하는 것인줄 알고 있지만/일년이 가면 또 새해가 돌아오는 것이 기쁘기만하다』(…共知人事何嘗定 且喜年華去復來).
눈에 덮인 먼산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인생을 보내기로 하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