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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술적 기반 갖춘 한국, 저출산 난제 풀면 강국 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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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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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 석학 자크 아탈리(72)는 한국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대단한 인물이다. 폐쇄적이면서 동시에 개방적인 한국 문화에 그는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24일 서울에서 열리는 제1회 한·불 리더스 포럼의 의장을 흔쾌히 맡은 것도 그 때문이다. 방한을 준비 중인 그를 배명복(사진) 논설위원·순회특파원이 지난 7일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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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아탈리 한·불 리더스 포럼 의장은 “한국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고 있다”며 “여성의 사회 참여를 늘려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이 놓인 지정학적 환경에 대해선 “오히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용수철 같은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한·불 리더스 포럼 의장을 맡은 이유는 .
“지적인 차원에서 한국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복잡다단함 속에서도 한국은 자기 정체성을 지키고, 나아가 외부에 발현까지 할 줄 아는 아주 독특한 나라다. 주변 강대국들의 위협 속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는 한국 문화가 내게는 매우 강렬하게 다가온다. 지금 한국 문화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일본 등 에는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은 폐쇄적이면서 동시에 개방적이다. 내가 한국에 지적 호기심을 갖는 이유다.”
한국인들 사이에 귀하는 ‘지성(知性)의 스타’로 통하고 있다. 귀하의 저서 중 18권이 한국어로 번역됐고,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이유가 뭐라고 보나.
“나처럼 한국인들도 미래에 대한 사유에 관심이 많기 때문 아닐까. 내일의 세계에 천착하는 한국인들이 내 책에서 유용한 생각을 찾는 것 같다.”
귀하는 2007년 출간한 『미래의 물결』에서 한국은 2050년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 중 하나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지금도 그런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나. 한국의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기에 묻는 질문이다.
“나는 한국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한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한국은 2050년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르는 데 필요한 기술적·문화적 수단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한국도 일본처럼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15년이면 일본이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란 예측이 1990년 무렵 많았지만 다 빗나갔다. 대외 개방 과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고, 너무 성급하게 미국과 공격적인 방식으로 경쟁하려 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유입된 것을 내재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탓도 있다. 그 결과 일본은 인구 구조가 무너지고, 활력을 잃은 사회가 됐다. 한국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한국은 개방성과 폐쇄성이 혼재된 나라인데, 폐쇄적 측면 때문에 고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한국은 불평등, 엘리트 층이 바뀌지 않는 구조, 인구 구조의 급격한 와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정당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해 제대로 자아 실현을 못하는 문제도 있다. 인구의 절반이 자기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는 반신불수 상태라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게다가 한국은 통일이라는 불편한 문제도 안고 있다. 2050년 한국은 세계적인 강국이 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한·불 교류와 협력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나.
“한국과 프랑스는 여러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구 규모 면에서 비슷한 데다 주변에 여러 강대국이 있는 점도 비슷하다. 수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한국처럼 프랑스도 외세의 침략을 받았지만 독립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와 한국은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라이벌 관계에 있지 않다. 보다 원활하게 협력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다.”
경제적으로 프랑스의 건강 상태가 심각하다. 귀하가 의사라면 어떤 진단과 처방을 하겠는가.
“질문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프랑스는 병자(病者)가 아니다. 여전히 강대국이다. 전 세계의 1%에 불과한 인구로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5%를 창출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더 잘할 수도 있다. 10%가 넘는 프랑스의 높은 실업률을 문제 삼지만 그것은 우리의 정치적 선택이란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제대로 임금을 못 받는 노동자보다 실업자를 택한 것이고, 독일과 미국은 반대의 선택을 했다.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임금을 주지 않으면서 실업자를 줄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혁명은 해도 개혁은 못하는 나라’가 프랑스라는 말이 있다. 역대 정부마다 개혁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리더십의 잘못인가, 아니면 개혁에 저항하는 국민 탓인가.
“외국 언론에 프랑스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지 않는 것은 나의 원칙이다. 우선 프랑스는 유구한 왕조적 전통과 국가주의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중앙집권적 전통을 가진 프랑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변화에 익숙한 나라다. 따라서 변화는 주로 혁명기에 이루어진다. 어려움이 서서히 쌓이다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진다. 예컨대 구겨진 화장지가 있다고 치자. 이것을 억지로 펴려고 하면 처음엔 잘 안 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장지가 찢어지면서 좍 펴진다. 지금 프랑스가 그런 상황이다. 역사적으로 프랑스는 그런 순간을 여러 번 맞았다. 대혁명이 있었던 1789년, 1830~48년, 1870년, 그리고 좀 더 가깝게는 1945년이 그랬다. 그 이후에도 과격함은 덜하지만 58년과 81년에도 혁명이 있었다. 81년 이후에도 여러 차례 혁명 요인이 있었지만 현실화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누적돼 왔다.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지 않으면 어느 순간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법이다.”
프랑스의 미래를 위해 가장 시급한 개혁 과제가 뭐라고 보나.
“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개혁이다. 특히 유치원 교육이 중요하다.”
지난해 11월 13일 파리 연쇄 테러로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면서 프랑스 국민의 인권이 부분적으로 제한되고 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보나.
“안전과 자유 중에서 선택하라고 하면 시민들의 선택은 당연히 안전일 것이다. 하지만 테러와 싸우면서도 인권을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고 본다. 둘은 양립할 수 없는 게 아니다. 일시적으로 충돌하고 있지만 프랑스에서 기본적인 인권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물론 앞으로 조심할 필요는 있다.”
언젠가 중국이 미국을 대체하는 패권국이 될 것으로 보나.
“절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중국은 패권국이었던 적도 없지만 그걸 바라지도 않는다. 중국을 ‘중원(中原)’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과 주변국의 관계에서 그럴 뿐이지 세계 지배와는 무관하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세계 지배를 추구한 적이 없다. 중국에는 그런 소명의식이 없다. 오히려 남에게 점령당한 역사가 있다. 주변 환경을 통제해야 할 절대적 필요가 있을 때는 지역적 패권을 추구할지 몰라도 절대 지구적 차원의 패권을 추구하진 않을 것이다. 더구나 중국 문화는 보편적인 문화가 아니라 자기 지향적인 문화다. 원자재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에 가고, 남미에도 가지만 지배를 위한 소명 때문은 아니다.”
지구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 시대의 최대 도전이 뭐라고 보나.
“첫째 도전은 기후변화이고, 둘째는 난민 문제다. 셋째는 일자리 문제다. 하지만 이 세 가지 문제도 지구적 차원에서 법의 지배가 실현된다면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이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려는 의지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발휘되지 않는다면 혼란이 발생하고, 국경 폐쇄와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유럽연합(EU)과 관련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영국 여론이 둘로 갈라져 있다.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가 현실화할 경우 EU의 장래가 어떻게 될 걸로 보나.
“EU에서 탈퇴하면 영국은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영국 일부 지역에서 EU 재가입 운동이 벌어질 것이고, 런던의 은행들은 너도나도 파리로 근거지를 옮길 것이다. 영국만 손해지 EU로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미·중 사이에서 한국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혹시 이 점에 대해 한국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러시아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협을 느낀다는 것은 중요하다. 위협이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느 의미에서 위협은 삶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위협 속에서 용수철 같은 힘도 솟는 것이다. 내가 굳이 한국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앞서 언급한 인구 구조적 문제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이민에 대한 태도 등 인구 구조적 문제에서 획기적 진전을 이루지 못한다면 한국은 균형을 잃게 될지 모른다.”
귀하는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 최근호(2월 24일자) 기고에서 ‘나는 무엇에 쓸모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한다고 했다.
“ 내가 사회에 쓸모가 있다고 느낄 때 내가 가장 행복해진다는 깨달음이 어느 날 왔고, 이때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몇 년 전부터 귀하는 사물과 현상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귀하가 말하는 ‘긍정적 경제’가 그렇고, ‘긍정적 이데올로기’가 그렇다. 이런 낙관주의는 귀하의 나이와 관계가 있는 것인가.
“지금보다 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웃음)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보는 사람의 태도에 달린 문제다. 축구 경기를 관전할 때는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에 따라 낙관론자가 될 수도 있고, 비관론자가 될 수도 있지만 선수 입장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기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낙관주의자도 비관주의자도 아니다.”
최근 귀하는 모든 국회의원의 임기를 두 번으로 제한하자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프랑스인들의 반응이 어땠 나. 한국에서도 국회의원들에 대한 실망감이 워낙 크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다.
“만일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친다면 프랑스 유권자의 90%가 찬성할 것 이다.”
워낙 활동 범위가 넓다 보니 딱 꼬집어 귀하를 뭐라고 정의하기가 힘들다. 귀하 자신은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해 주기를 바라나.
“창조적 활동가로 기억해 주면 좋겠다. 내가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은 윤회나 환생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현생에서 여러 가지 삶을 동시에 살고 싶을 뿐이다.”
요즘은 어떤 일에 관심이 있나.
“한국 방문 준비를 하고 있고, 대통령의 국정 과제에 대한 책 출간도 준비 중이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세계 각지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야 하기 때문에 그 연습도 하고 있다. 곧 내가 만든 오페라도 무대에 오른다. 쓰고 있는 소설도 탈고해야 한다. 내가 쓴 희곡이 오는 9월 연극으로 상연되기 때문에 그 준비도 하고 있다.”

자크 아탈리 한·불 리더스 포럼 의장
한·불 수교 130돌 서울서 첫 개최
한국 방문 앞둔 세계적 석학 인터뷰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bae.myungb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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