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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현철의 시시각각

AI 경제는 ‘비보호’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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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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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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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송도로 가는 길을 내비게이션 앱에 물었다. 주말이라 고속도로가 막히니 주변 도로로 우회하란다. 서울을 막 벗어났을 무렵, 갑자기 길이 막혔다. 영문을 모른 채 앞차 꽁무니를 따라가다 보니 신호등 하나가 서 있었다. 좌회전 신호가 너무 짧아 직진 차량까지 못 가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도 신호등은 파란불만 켜고 있었다. 성미 급한 차들이 불법 좌회전을 하면서 교차로는 더욱 엉망이 됐다.

돌아오는 길에도 비슷한 네거리를 지났다. 하지만 예상외로 쉽게 지나갔다. 차이를 만든 건 신호등에 붙어 있던 표지판 하나였다. 비보호 좌회전과 유턴을 할 수 있다는 표시였다. 덕분에 좌회전 차도, 직진 차도 통행 속도가 빨라졌다. 철판에 그려놓은 몇 만원짜리 표지판이 값비싼 지능형 교통시스템 못지않은 역할을 했다. 인간이 알아서 하도록 유연성을 부여하는 단순한 해법이 정체를 풀고 통행속도를 높였다. 밤이 되면 점멸신호로 바뀌는 신호등이나 선입선출로 지나가는 회전교차로도 같은 원리다. 똑같은 돈을 투자했다면 효율성을 가르는 건 운영이다. 그리고 경직된 질서와 규제는 효율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며칠 전까지 대한민국은 온통 인공지능(AI)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로 들썩였다. 이 9단은 졌지만 국민에게 큰 선물을 남겼다. AI에 대한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알파고의 실체와 알고리즘, AI 연구의 현주소와 제품화 추세를 온 국민이 다 알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도 이런 분위기에 부응했다. 지난 9일 미래창조과학부는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을 계기로 지능정보기술 관련 투자를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300억원을 투자해 AI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한다. 장관은 13일과 14일 이틀 연속 기업과 국책연구소를 돌며 연구 상황을 보고받았다. 산업통상자원부도 14일 업계와 학계 전문가들을 모아 간담회를 하고 AI 응용과 산업화 촉진 방안을 논의했다. 미래부처럼 AI 개발과 연구소 지원에 쓰는 예산을 올해보다 대폭 늘린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우리 AI 산업은 미국에 2.6년 뒤떨어져 있고 중국보다 못한 수준이다. 기초연구부터 응용, 제품화까지 모두 그렇다. 미래의 산업은 물론 인간의 삶을 바꿀지도 모를 분야에서 이래선 곤란하다. 이 9단의 패배는 영 아쉽지만 알파고 쇼크가 이를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면 전화위복이다. 당장 돈이 안 되는 AI 같은 분야야말로 정부의 마중물 투자가 절실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연구자들과 기업들의 반응은 시원찮다. 투자도, 운영도 정부가 직접 하겠다는 구태의연한 방식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그럴 만도 하다. 1990년대 컴퓨터 운영체제였던 MS 도스를 대체한다며 K-도스를 개발했다. 유튜브가 뜨자 2013년 6개월 만에 K-튜브를 만들었다.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다. 써보기는커녕 이런 게 있었다는 걸 아는 이도 거의 없다. 과정보다는 결과, 기초연구보다는 눈에 보이는 성과에 매달리는 단기적인 시각 탓이다. 질보다 양을 따지는 관료주의는 기초과학 연구의 핵심인 창의성을 가로막고 있다. 오죽하면 서울대·고려대·연세대·KAIST·포스텍 등 이공계를 대표하는 5개 대학이 “계량적 평가에 치중하는 현재의 정부 지원 시스템으로는 미래 발전 동력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들고 일어났겠는가.

AI는 정보기술과 디지털의 첨단 분야다.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면 효율적인 연구개발 인프라를 깔아야 한다. 기껏 도로를 만들고 신호등으로 길을 막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사고를 방지한다며 방향과 속도를 일일이 지시해서도 안 된다. AI 투자라는 도로에선 규제 신호등을 되도록 적게 달고, 비보호 좌회전이나 유턴 같은 유연성은 최대한 많이 허용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롭게 길을 누비며 지름길을 찾을 수 있다. 안 되는 것 빼곤 다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의 첫걸음을 AI 연구부터 적용해 보면 어떨까.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