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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악연 버리고 용서하려 한다. 국민 여러분 용서해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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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출판기념회가 10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사진 박종근 기자]

"머지않아 내 육신마저 버리고 떠나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이제 지난 날의 악연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부덕의 소치로 본의아니게 고통을 국민 여러분께 드린 것도 적지않다고 생각합니다. 용서해 주실 것을 빕니다. 지난 세월동안 고난을 감내하며 조국 발전에 땀 흘리며 함께 해주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90세 노(老)정객의 연설에 청중들은 숙연해졌다. 여성지지자들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쳤다. 김종필 전 총리(JP)는 10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김종필 증언록』 출판기념회에서 그렇게 '거인'의 퇴장을 스스로 선언했다.

김 전 총리는 이날 그간의 소회를 원고에 적어 25분간 읽어내려갔다. 그는 증언록에 대해 “그간 잘못 알려졌거나 왜곡된 일부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았다는데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반세기 전 혁명으로 세상을 뒤엎었던 역사적 빚을 갚았다는 홀가분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이 나라 정치는 한 시대가 저문 것 같다. 제 주변 전우들은 거의 다 세상을 하직하고 개발시대 정치인 중 나 한사람 남아있다”며 “아마 정치에 대해 한 말씀 하라고 아직 남겨준 것 같다”고 퇴장사를 시작했다.

그가 현실정치에 던진 마지막 조언은 공자가 남긴 ‘사무사(思無邪ㆍ생각에 사악함이나 못된 마음이 없어야 한다)’였다. 김 전 총리는 “우리 정치가 목전에 닥친 선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갖가지 산재한 국가적 어려움을 소홀히 다루는 것같아 안타깝다. 정치가 국민의 안녕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들이 정치를 더 걱정하고 있다”며 “민의(民意)의 전당이라는 국회가 본래 기능을 하지 못해 ‘정치 똑바로 하라’는 (국민들의) 소리가 제 귀에도 들린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가관이 없이는 올바른 정치관이 나올 수 없다. 국가관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려 한다거나 대통령 되는 꿈만 꿔서는 어떻게 되겠느냐”며 "국민과 국가의 영생을 바란다면 작은 당리당략은 뒷전에 놔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분들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뵙고 인사를 나누는 기회는 앞으론 없지 않나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도 금할 길이 없다"며 "지난 세월동안 고난을 감내하며 조국 발전에 땀 흘리며 함께 해주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께 엎드려 감사 드린다"고 맺었다.

마지막 대중연설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온 김 전 총리에게 지지자들은 몰려들었다. 그러곤 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출판기념회에는 김 전 총리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듣기위해 정계·재계·문화예술계 등 1000여명의 인사가 참석했다. 김 전 총리와 친교를 맺어온 나카소네 야스히로(98·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는 와타나베 히데오(渡邊秀央) 일한협력위원회 회장대행을 보내 축사를 전했다.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은 축사에서 “많은 회고록이 민감하고 미묘한 문제를 피해가느라 평범하고 한가했지만 JP는 우회하지 않았다. 격동의 순간을 솔직하고 실감나게 증언해 과거 어떤 회고담보다 현장성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김 전 총리의 발언을 인용해 "권력의 정점부터 역경의 세월을 겪은 후 세상만사 이치를 터득해 이른 심오한 결론”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전문.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작년 5월 이 자리에서 화보 출판 기념회를 가졌는데 꼭 열 달만에 현대사 증언록을 책자로 해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저자 서문에 썼습니다만 이 책은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한 시대의 증언이 되었다. 5·16 혁명 이후 반세기 동안 헌정에 참여해온 저로서는 그 시대, 그 현장, 그대로를 증언하는 그 이상으로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저를 알아주시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비록 반신불수의 육신이 되었지만은 다행히 하느님께서 제 기억력을 어지간히 남겨주셔서, 길다면 긴 40여년 정치 역정의 주요 대목을 그럭저럭 되짚을 수 있었습니다. 열정적인 인터뷰로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발굴하기 위해서 애써주신 중앙일보 회장님을 비롯해서 여러모로 도와주신 몇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작년 1월, 중앙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저의 현대사 증언 '소이부답'은 나름대로 몇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잘못 알려졌거나 왜곡된 일부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았다는 점이 그 첫째입니다. 또 개인적으론 반세기 전 혁명으로 세상을 뒤엎었는데, 그런 역사적인 빚을 갚았다는 점에서 홀가분한 기분도 가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번영과 민주주의는 그 혁명의 성공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발전에는 도전과 응전이 교차하는 가운데 시대를 관통하는 그 시대의 논리가 있습니다. 어제는 어제의 논리가 있고, 오늘은 또 오늘의 논리 위에서 성장하는 것이 역사입니다. 흔히 오늘의 잣대로 과거사를 재단하는 버릇이 좀 있습니다만은, 사려깊지 못한 생각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제의 한, 도전, 이런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오늘의 모든 희망과 정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사 앞에서는 경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 역사 발전에 있어서는 온고지신이라는 교훈이 필요합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제가 현대사 증언에 임했다는 점을 간단하게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한 가지 덧붙여야할 일이 있다면, 이런 출판된 이 증언록이 우리나라 현대사를 이으는데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박수)

오늘 이 자리에 우리 나라의 고위 지도층에 계신분들이 많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또 금은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특히 지금 매우 분주한 때인데도 이렇게 오신 것에 대해서 뭐라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지난 시대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몇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을, 그런 점으로 참작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여러분이 공감하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이제 이 나라 정치는 한 시대가 저문 것 같습니다. 개발시대 정치인 중에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아마 제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우리 정치에 대해서 한말씀 하라고 아직 남겨둔 것 같습니다. 제 주변에 전우들이 거의 다 세상을 하직해서 저 한사람 남아있는 것이 한 말씀 남기고 가라, 아직 남겨둔 뜻이 그런 데 있지 않나 스스로 다짐해봅니다. 많은 상념이 오갑니다만은 오늘의 이 시대는 참으로 엄중한 시대입니다. 세계 경제의 침체로 수출이 줄고 기업과 민생이 어렵습니다. 특히 북한의 핵문제, 그리고 대륙간탄도유도탄 발사,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안보위기가 더욱 가중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정치인 같은 분들이, 정부에 현명한 대책을 촉구하고 국민의 인내와 단합을 이끄는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박수)

그러나 우리 정치가 목전에 닥친 선거때문인지, 그런 이유가 있어서인지 갖가지 산재한 국가적 어려움을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정치가 국민의 안녕을 생각해 국민이 정치를 염려하는, 그 염려를 덜어줘야만 할텐데, 정치인들이 국민을 걱정하는 것보다는 국민들이 정치를 더 걱정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가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국민들은 안타깝게 생각들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치 똑바로 해라, 하는 소리가 저의 귀에까지 들립니다. 우리 정치, 좀 더 슬기롭게 본연의 기능을 찾아서 밀고 끌고 왕성한 보조를 맞춰서 전진할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박수)

정치의 목표가, 잘 아시는 일입니다만 무엇입니까. 정치인은 무엇보다 먼저 철저한 국가관을 몸에 지니고, 뇌와 가슴에 다져넣고, 나라와 국민을 모든 가치의 최상에 올려놓고 이끌어야하겠습니다. 국가관이 없이는 올바른 정치관이 나올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철저한 국가관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권력을 차지하는, 한나라의 대통령 꿈만 꾸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 어지럽히는 헛된 꿈은 접어야합니다.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사악한 게 없다는 뜻)입니다. 모름지기 정치인은 한결같이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생각해야 하며 사심은 버리고, 문자 그대로 생각하는 것은 사가 있어서가 아니라, 봉사해야 된다고 믿습니다(박수)

국민과 국가의 영생을 바란다면 작은 당리당략은 뒷전에 놔야할 것입니다. 제가 마지막 정치생명을 걸고 내각책임제를 추진했던 이유 또한 나라의 먼 장래를 위한 이상 아닌 이상을 호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모든 선진국이 지금 지구상의 선진국들은 모두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우리보다 앞지른 희망을 가지고 달리고 있습니다. 왜 우리라고 해서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제도를 버려야 국회가 바로 민의를 살펴서 똑바로 설 수 있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박수)

우리가 비록 이루지 못한 일이지만 나라 장래를 걱정하는 국가관에 투철한 후진 정치인들이 반드시 계승해서 이뤄주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이 아흔을, 구순 또는 조수라고 합니다. 인생을 졸업한다는 뜻이겠지요. 옛 선현의 말씀에 인명은 재천이요, 공수래공수거라 했습니다. 그동안 구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애증과 회한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머지않아 내 육신마저 버리고 떠나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악연도 깨끗이 잊어버리고 용서하려고 합니다. 모두가 한생의 업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동안 부덕의 소치로 본의아니게 고통을 국민 여러분께 드린 것도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를 해 주실 것을 비는 바입니다. 오늘 저는 많은 분들, 한자리에서 뵙고 인사를 나누고 하는 기회는 이제 앞으로는 없지 않나 생각하고 섭섭한 마음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지난 세월동안 고난을 감내하며 조국 발전에 땀 흘리며 함께 해주신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희 생애동안 항상 동행해주시며 힘을 보태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조국, 대한민국의 번영과 무구한 번영과 융성을 기원하면서 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지상·김경희 기자 groun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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