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칼럼] 빚으로 사는 나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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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00년 4월 국제금융시장에서 투기거품이 사라지자 경제전문가들은 신경제의 조기 마감 이후 경제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골몰했다. 그러나 2001년 발생한 9.11테러 사태는 그 문제에 대한 새로운 검증을 제시했다. '경제가 1990년대와 더 이상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진 산업국가들은 경제의 새로운 동력을 찾으려는 대신 당면한 실업 감소와 소비수요 증대를 위한 정책수단으로 공공 부문에 오랜 숙제인 적자예산을 사용하게 됐다.

미국 정부는 2008년까지는 매년 적자예산을 편성할 수밖에 없음을 발표했고, 일본은 1993년 이래 이미 위험한 적자예산의 악순환 속에 있고, 유럽연합(EU) 또한 예외가 아니다.

*** 가계빚 증가를 통한 수요 창출

여기서 분명해진 것은 경제운영의 우선순위가 변했다는 것이다. 경제.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장 대신 정부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반인들도 80년대와 90년대에 자유경제와 시장해결의 탁월성과 효율성이 강조됐던 것과 달리 정부의 조정력에 신뢰를 보내는 것 같다. 따라서 앞으로는 공공 부문에 부채 증가가 경제정책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선진국들의 경제 현실이다.

한국 경제의 현실도 예외일 수는 없는 것 같다. 현재 한국 경제는 구조적 취약성과 함께 투자와 소비의 감소로 인한 총수요 부족으로 저성장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시장기능에 의한 총수요 증가는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다. 그동안 강조돼 왔던 민간자율과 시장기능에 의한 경제활동만으로는 현재의 경제상황을 극복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정부의 경제정책 기획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경제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심지어 전경련은 투자활성화를 위해 10대 재벌총수들의 대통령과의 개별 면담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기업은 수익전망이 있으면 투자를 하고, 그렇지 못하면 하지 않는 것이 자유시장경제의 상식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재벌총수들과 개별적으로 면담한다고 해서 수익전망이 어두운데 투자가 활성화될 수 있을까? 물론 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전경련의 발상은 시장기능을 신뢰하기보다는 정부의 정책에 더 의존하려는 경향을 입증하는 것이다. 솔직히 얘기하면 현재의 한국 경제는 IMF사태 이후 투입된 1백59조원의 공적자금, 1백20조원이 넘게 증가한 정부 채무, 기타 공공자금, 그리고 가계부채의 증가를 통한 수요 창출을 통해 가까스로 유지됐다.

공공 부문의 부채 증가가 경제 유지에 결정적 기여를 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의 경제상황은 보다 적극적인 정부의 역할을 다시 요구하고 있다. 통화는 풍부하고 금리는 건국 이래 최저 수준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투자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가계는 현재의 소득 수준에서 소비수요 증대의 한계에 도달해 있고, 기업은 불확실한 수익전망으로 투자를 망설이고 있다.

또한 국제 경기여건을 고려할 때 수출수요 증대를 통한 성장률 제고도 크게 기대할 수 없다. 결국 성장을 촉진하고 고용을 유지하기 위한 총수요 증대의 수단으로 정부의 재정확대가 유일할 수밖에 없다.

*** 국채 발행 등 적자재정 각오를

현재 한국 경제의 거시경제지표로 보아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4조원의 추가경정예산은 지속적 성장을 유지하기 위한 전환점을 마련하는 데 충분하지 못할 것 같다.

따라서 정부는 추가적인 수요 창출을 위해 국채 발행을 통한 과감한 적자재정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정부는 재정적자를 통한 재원이 사회간접자본이나 교육 부문 투자를 위해 사용되지 않을 경우 '오늘 재정적자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미래의 경제성장을 방해한다'는 법칙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특히 정부는 IMF 사태 이후 공공 부문의 부채가 단기간에 급증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일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지속적인 구조조정이 동반되지 않은 지출확대 정책만으로는 한국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기반 구축이 이뤄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