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설악에 살다] (16) '권경업과 배종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그는 오랫동안 말도 안되는 짓을 일삼고 다녔는데, 알고보니 그의 사형(師兄) 배종순씨가 그런 행동의 원조였다.

대구 팔공산악회의 오상균씨가 언젠가 '별 해괴한 친구'를 산에서 만났다며 혀를 껄껄 찬 적이 있다.

"부산 산악인들과 대구 팔공산에서 합동산행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부산에서 온 어떤 산꾼이 모닥불 곁에서 반바지에 반팔 옷차림으로 밤늦도록 앉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정말 추위에 강한 체질인가보다 하고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가까이 가봤어요. 그러나 웬걸. 얼굴이 청동빛으로 얼어 붙은 데다 가느다란 팔다리를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물어봤죠. 안 춥냐고요. 그랬더니 이 양반 대답이 걸작이더라고요."

"보면 모르냐. 이렇게 떨고 있는 걸."

"그럼 옷이 없는 모양이군요. 빌려줄까요."

"옷은 나도 많구마."

"그런데 왜 이런 겨울산에서 반바지만 입고 떨고 있나요."

"귀찮게시리 자꾸 물어보네. 이건 어떤 산선배의 가르침을 따르는거구마. 그 선배 말이 토왕폭을 오르거나 알프스의 아이거북벽을 등반할라카마 이 정도 추위는 알몸으로 견뎌내야 한다고 했구마는. 지금 나는 토왕폭과 아이거북벽 등반 훈련 중인기라."

그 다음날 오상균씨는 부산에서 온 이 괴짜와 함께 팔공산 병풍암을 등반했다. 꽤 까다로운 코스를 오르는데, 그 괴짜는 여전히 반바지차림으로 손에는 속칭 고구마장갑이라는 면장갑을 두 개씩이나 끼고 있어 바위틈 사이를 제대로 잡지 못해 쩔쩔 맸다.

전날 밤처럼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오씨는 "장갑을 벗고 오르면 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아참, 또 귀찮게 하는구마. 내가 지금 팔공산 병풍암을 오르고 있는 줄 아능교. 천만에! 나는 지금 아이거북벽에 붙어있는기라. 그런 곳에서 맨손으로 등반하다가는 손가락 모두 동상 걸려 잘려버릴 꺼구마는. 이런 지혜 모두들 그 위대한 산선배한테서 배웠구마는."

오씨가 팔공산에서 만났다는 그 부산 괴짜가 권경업씨였으며, 그에게 그런 산행법을 가르쳐준 이가 바로 권씨의 토왕폭 자일 파트너였던 배종순씨였다.

토왕폭 제2등에 성공한 부산 엑셀시오산악회의 배종순씨가 1986년 어느 봄날 서울로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배씨는 토왕폭 등반 때의 또 다른 자일 파트너였던 김원겸씨와 아이거북벽 겨울 원정에 나설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82년과 83년 이태에 걸쳐 두 번의 알프스 등반 경험이 있는 내게 알프스 현지 사정에 대해 자문하고 싶었던 것이다.

광화문의 어느 술집에서 우리는 알프스는 건성으로 건너 뛰어넘고 토왕폭 얘기를 안주삼아 강소주를 마구 들이켰다. 배종순씨는 77년 1월 토왕폭을 두 번째로 오를 때 소토왕골에서 훈련 산행을 가진 뒤 비룡폭포 위에 설치한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다가 토왕폭 쪽에서 들려왔다는 어떤 비명 소리에 대한 궁금증을 털어놨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