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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왜 회장 물러났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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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박 회장의 조카인 박정원(54) ㈜두산 지주부문 회장, 박용만(61) 회장

두산그룹 총수가 박용만(61·사진) 회장에서 박 회장의 조카인 박정원(54·사진) ㈜두산 지주부문 회장으로 바뀐다. 120년 역사의 두산그룹에서 '4세 경영'이 개막된 것이다.

두산그룹은 2일 열린 ㈜두산 이사회에서 박용만 회장이 사임 의사를 밝혔다고 발표했다. 박 회장은 회의에서 “그룹 회장직을 물려줄 때가 됐다. 차기 이사회 의장으로 박정원 회장을 천거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두산은 지주사인 ㈜두산의 이사회 의장이 그룹을 통솔해 왔다. 박정원 회장의 의장 선임은 25일 이사회에서 확정된다.

박정원 회장은 박용곤(84) 명예회장의 장남이자, 고(故) 박두병 창업 회장의 맏손자다. 1896년 배오개(종로 4가)에 포목점을 열었던 박승직 창업주부터 따지면 ‘두산가 4세’다.

지금까지 두산은 형제들이 번갈아 그룹 회장을 맡는 독특한 관행을 지켜왔다. 장남인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을 시작으로 3남 용성, 4남 용현, 5남 용만 등 '용(容)’자 돌림에 이어 이번엔 ‘원(原)’자 돌림 중 처음으로 맏형이 그룹 회장에 오르게 됐다. 85년 두산산업에 입사한 박 회장은 주류·상사·건설 등을 두루 거쳤다.

1999년 ㈜두산 부사장으로 상사 부문을 맡아 일본 수출 시장을 적극 공략해 매출을 30% 이상 끌어 올렸다. 지난해엔 ㈜두산 회장으로 주요 기업간 혈투가 벌어진 ‘면세점’사업 진출을 지휘했다.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의 구단주이기도 하다.

두산 관계자는 “그룹 인수합병(M&A)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승부사 기질을 보여왔다”고 밝혔다.

그룹 총수에서 물러나는 박 회장은 지난 2012년 4월 형인 박용현(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 회장의 뒤를 이어 그룹을 맡았다. 이후‘중공업·기계·건설’ 등 자산 33조원으로 재계 17위인(공정거래위원회 분류 기준) 두산을 책임져왔다.

특히 최근엔 실적 부진에 빠진 그룹의 회생을 진두지휘했다. 또 대한상의 회장 자격으로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원샷법’(기업활력제고특별법) 제정을 위해 1000만 명 서명 운동도 주도했다. 이처럼 다방면에서 목소리를 내 왔기에 박 회장의 갑작스런 사임은 더욱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일단 본인은 ‘준비된 승계’라고 선을 그었다. 박 회장은 이날 “회장직 승계는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라며 “이사 임기가 끝나는 올해가 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특히 “이런 생각으로 지난 몇년 간 업무를 차근차근 이양해왔다”고 공개했다.

박 회장이 ‘비즈니스 미션’을 마쳤다고 말한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그는 “세계적 경기 침체 속에서도 지난해까지 ‘턴 어라운드(흑자 전환)’할 준비를 마쳤다”며 “할 일을 다했다”고 말했다. 재계 안팎에선 ‘총수 압박감’을 벗은 그가 대한상의 회장으로 비즈니스보다는 정무적인 일에 적극적 역할을 모색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박 회장은 2013년 8월 상의 회장에 취임한 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가석방, 남북 경협의 본격 추진 같은 굵직한 현안을 ‘직설 화법’으로 제시해 주목받았다. 특히 그는 평소 1200명의 페이스북 친구를 두고 정치·경제·사회적 소신을 거침없이 밝혀왔다. 그래서 ‘미스터 쓴소리’로 불렸다. 그가 회장이 된 이후 '상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다만 박 회장이 총수직을 내려 놨지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직은 유지한다. 또 인재 육성을 위해 설립한 ‘두산 리더십 인스티튜트’ 회장도 맡는다. 이에 따라 일단 상의 회장직을 계속 수행할 자격 요건은 충분하다. 회원사 임원 이상이면 회장을 맡을 수 있다. 박 회장의 남은 상의 회장 임기는 2018년 3월까지고, 연임도 가능하다.

또 박용만 회장은 물러 나지만 그의 장남인 박서원 (주)두산 전무는 그대로 남아 면세점 사업을 맡는다.

이처럼 큰 갈등 없이 총수 승계가 이뤄지지만 한국기네스협회가 인정한 국내 ‘최장수 기업’ 두산의 미래가 녹록하진 않다. 박용만 회장이 ‘턴어라운드 희망’을 얘기했지만 지난해 그룹 순손실은 1조7000억원에 이른다. 특히 박 회장이 맡게 될 두산인프라코어는 2일 사업부의 하나인 ‘공작기계’를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에 매각키로 했다.

회사 관계자는 “박 회장도 매각 작업에 관여했다”며 “이사회 멤버로 들어가 최근 구조조정과 관련해 흐트러진 회사 분위기 등을 잡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술·함종선 기자 jso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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