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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없소? 신문지 싼 권총이 20분 만에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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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모 지방대 교수로 있던 박모(68)씨는 필리핀 마닐라 인근 카비테주(州)에 ‘세컨드 하우스(별장)’를 마련했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의 안락한 여생(餘生)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7년 전 쯤 은퇴한 후 매년 수개월씩 필리핀에 머물며 골프 등을 즐겼다. 가족들도 종종 왔다. 하지만 행복한 노후는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달 22일 자택에서 흉기에 찔려 숨지면서다.

필리핀 ‘한인 피살’ 현장을 가다

현지에 파견된 한국 경찰청 수사관 5명은 필리핀 경찰과 공조해 폐쇄회로TV(CCTV)를 분석한 뒤 사건 발생 시점 박씨 집에 출입한 필리핀 여성 A씨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다. 지난달 새로 고용된 20대 초반의 가정부다. 필리핀 경찰은 A씨를 체포해 살인 동기 등을 캐고 있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K팝 열풍’의 진원지였던 필리핀이 지난 수년간 한인 피살사건이 잇따르면서 ‘범죄의 땅’으로 인식되고 있다. 2013년 이후 필리핀에서 목숨을 잃은 한인은 34명(30건)이다. 해마다 10명 이상이 숨진다.

필리핀에서 20년 동안 사업을 해온 김모(50)씨는 “‘K팝’ 대신 ‘K크라임’이란 말을 써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한 해 120만 명에 달하는 필리핀 관광객들의 공포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본지가 경찰청과 외교부의 도움을 받아 지난달 1일부터 5일간 필리핀 마닐라·앙헬레스를 현지 취재한 결과 지난 3년간 필리핀 내 한인 피살자 34명 중 관광객은 전무했다.

33명은 박씨와 같은 ‘로컬 코리아노(Local Koreano·필리핀에 정착해 현지인처럼 사는 한국인을 뜻하는 타갈로그어)’였다. 나머지 1명은 지난해 필리핀의 아들 집에 갔다가 이틀 만에 납치 살해된 홍모(74)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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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소재 ‘코리안 데스크’에서 근무 중인 서승환(39) 경정은 “관광객 등 일시 체류자가 살해된 건 거의 없고 현지에서 맺은 갈등관계가 발단인 사건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갈등을 겪다가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해 저지른 청부 살인이 전체 30건 중 10건이나 됐다. 또 20건의 범행 도구는 총기였다. 필리핀에서 총기 소유는 합법이지만 불법 총기도 100만 정 이상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본지 기자가 마닐라 교민 K씨에게 총을 쉽게 구할 수 있 는 게 사실이냐고 묻자 20분도 채 안 돼 신문지에 싸인 권총을 구해왔다. K씨는 “50만원만 주면 쓸 만한 권총을 언제든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닐라·앙헬레스(필리핀)=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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