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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배추 뜯어먹고, 장터서 잠들고…내 소설은 대부분 체험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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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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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한국의 분단 현실을 천착해 온 소설가 김원일씨. 체험을 생생하게 살린 소설집 『비단길』을 최근 출간했다. 표제작 ‘비단길’에서 주인공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60년 만에 만나는 장면을 그렸다. 월북한 아버지를 만나는 설정은 지금껏 김씨 소설에서는 없었다.

가파른 요즘의 남북 대치 국면에 누구보다 심사가 편치 않은 이가 소설가 김원일(74)씨다. 분단, 한국전쟁, 그 와중에 생이별해 기일(忌日)도 알지 못하는 아버지 등이 평생 그가 씨름해 온 소설 주제여서다.

소설집 ‘비단길’ 낸 김원일

 마침 올해 그는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그에 맞춰 주로 작년·재작년에 쓴 중·단편 7편을 묶어 소설집 『비단길』(문학과지성사)을 최근 펴냈다. 소설집으로 여덟 번째, 이로써 전체 작품은 서른 권에 육박하게 됐다.

 다섯 살 아래 김원우씨와 함께 형제 소설가인 그는 한국전쟁 당시 남로당 서울시당 재정 부부장이었던 아버지가 월북한 것으로 유명하다. ‘좌익 가족’으로서 평생 업보처럼 짊어져야 했던 고통과 억울함을 그는 60만 부 넘게 팔린 장편 『마당 깊은 집』, 다섯 권짜리 대작 『불의 제전』 등에서 실감 나게 드러낸 바 있다.

 『비단길』은 매몰차게 말하면 ‘동어반복’이다. 9·28 수복이 임박한 서울 시내, 그동안의 행적과 이념에 따라 남북 어디를 택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는 상황을 그린 ‘난민’, 김씨 자신의 방북기를 다큐멘터리처럼 전하는 ‘아버지의 나라’ 등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기존 소재와 주제 주변을 맴돈다. 그런데도 강렬하다.

 중편 길이 표제작 ‘비단길’은 언제 봐도 눈물 나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현장을 그린 작품이다. 소설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뜸을 들인다. 뻔한 얘기 아냐, 하는 의심이 돋아날 무렵 묵직하고 깊숙하게 감정선을 치고 들어 온다. 김씨는 동작 투박해도 뼈와 힘줄의 위치를 잘 아는 숙수처럼 우리 안의 보편적인 슬픔을 선명하게 돋을새김한다.

 22일 서울 서초동 김씨 자택을 찾았다. 그는 인터뷰 약속을 잡을 때 다음날인 23일은 안 된다고 했다. 몇 달 전부터 하루 걸러, 한 번에 서너 시간씩 신장 투석을 받고 있어서다. 병원에 가는 날이라는 얘기.

 그런데도 “치료 때문에 한동안 작품을 쓰지 못했다”며 좀 더 따뜻해지면 다시 쓰기 시작할 거라고 했다.

 - 그동안 한국전쟁에 관한 작품을 많이 썼다.

 “전체의 한 60%는 되는 것 같다. 누구나 가장 강렬하게 오래 남는 기억에 대해 쓰게 마련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독일의 토마스 만, 존경하는 포크너, 제임스 조이스 같은 분들이 다 그랬다. 사물과 주변을 인식하고 자각하기 시작하는 내 유년기의 주된 기억은 굶은 기억이다. 전쟁 직후 먹을 게 없어 생배추 뜯어 먹고 장터에서 속옷 바람으로 자고 그랬다. 난 운이 좋아서 북으로 넘어가지 않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추위, 배고픔, 가난에 대해 쓰는 건 자신 있다.”

 -전쟁체험의 상처가 클 텐데 소설로 쓰고 나면 풀리나.

 “그런 건…없다. 나는 좋은 학교도 못 다녔고 똑똑하지도 않다. 그저 어머니를 닮아 근면한 거 밖에 없다. 다양한 소재에 호기심이 안 생기니 경험을 쓸 밖에. 소설에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도 젊을 때 얘기지, 이번 소설집을 찬찬히 살펴 보니 누구한테 들은 얘기랄 것도 없이 대부분 내 체험담이더라.”

 김씨는 ‘50주년의 감회’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소감을 묻자 “특별한 게 없다”고 했고, 작가로서의 보람 역시 “크게 느낀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전쟁과 아버지에 대해서는 얘기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특히 ‘비단길’의 배경이 된 2010년 남북 상봉 때 진행요원으로 참가했다가 상봉 하루 전날 남한의 한 바닷가 횟집을 홀로 찾아 소주 네 병을 마시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철철 울었다고 했다. 횟집 주인 아줌마가 자살하려는 사람 아닌가 걱정하는 기미가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앞으로 쓸 소설도 아버지에 대해서다. “월북했던 아버지가 곧 빨치산으로 내려와 52년까지 강원도 일대에서 투쟁하다 다시 북으로 돌아간 얘기를 제대로 쓰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전쟁과 분단 현실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블랙홀인 셈이다. 그 고통의 원인이 해소되지 않는 한 우리 역시 김씨의 소설을 계속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사진=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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