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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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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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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세를 일기로 지난 27일 별세한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는 현대 정치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85년 2월 제12대 총선 당시 신민당 후보로 전주에서 출마해 유세를 하고 있다.

야당 정치의 1세대를 이끌었던 소석(素石)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가 27일 새벽 별세했다. 94세. 고인은 헌정회 원로위원회의 의장으로 최근까지도 사무실에 출근해 외신 뉴스를 읽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이달 중순 감기로 병원에 입원한 뒤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YS·DJ와 ‘40대 기수론’ 이끈 한국 야당 1세대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삼성서울병원에는 첫날부터 노재봉 전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계 원로들과 지인들의 추모 발걸음이 이어졌다. 또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이명박·전두환 전 대통령, 정의화 국회의장, 황교안 국무총리,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 손명순·이희호 여사 등이 조화를 보내 고인을 추모했다.

 정의화 의장은 28일 조문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고 의회민주주의 기틀을 쌓은 분”이라며 “ 후배들의 귀감이 될 그런 분이셨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빈소를 찾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태산북두(泰山北斗·존경받을 만한 뛰어난 인물) 같은 분, 따를 수 없는 인품을 가진 분이었다”며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전주고와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해방 직후인 1946년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장과 전국학생총연맹 대표 의장을 맡아 반탁과 반공 운동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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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유진산 신민당 당수 시절 당내 파벌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당시 김영삼·김대중 의원과 3자 회동에 나선 이 전 대표.

‘학생운동 1세대’로도 꼽히는 이 전 대표는 54년 제3대 총선 때 전북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다. 그해 초선의원으로 이승만 정권이 추진한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면서 본회의장 단상에서 국회 부의장의 멱살을 잡은 일화도 있다.

56년에는 현재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뿌리인 ‘민주당’ 창당을 주도했고, 61년 5·16 쿠데타 직후 군부에 의해 해외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줄곧 전주에서 당선됐으며 7선(3·4·5·8·9·10·12대)의 경력을 갖고 있다.

 이 전 대표의 정치 역정 중 가장 유명한 장면은 70년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이다. 당시 48세였던 이 전 대표는 YS(김영삼 전 대통령),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함께 ‘40대 기수론’의 한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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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이 전 대표가 국회의원 시절 테니스를 치는 모습. [중앙포토]

이 전 대표는 “YS에게 양보하라”는 당수 유진산의 요구로 경선을 포기했다. 하지만 경선 1차 투표에서 YS는 과반에 실패했다. 이후 치러진 2차 투표에선 이 전 대표가 ‘DJ 지지’로 돌아서 DJ의 대역전승을 이끌어냈다.

 이 전 대표는 독재에 맞서면서도 반공을 일관 되게 견지했다. 76년 신민당 대표 시절 “안보에는 여야가 없다”며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언급한 ‘주한미군 철수론’의 철회를 요구했다.

이 전 대표는 88년 13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자유총연맹 총재 등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창희 여사와 아들 이동우 전 호남대 교수, 딸 이양희 유엔 미얀마인권보호관, 사위 김택기 전 의원이 있다. 발인은 다음달 2일, 장지는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이다.

최선욱기자 isotop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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