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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尺巷 -육척항-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67호 27면

중국 안후이(安徽)성 둥청(桐城)시의 육척항(六尺巷) 골목이 북적인다는 소식이다. 중국의 설 특집 버라이어티쇼 춘완(春晩)에 ‘육척항’ 뮤직비디오가 방영되면서다. 둥청은 청(淸)초 중국 문학을 이끈 ‘둥청파’가 발원한 문향(文香)의 도시다. 육척항은 ‘양타삼척(讓他三尺)’ 고사의 발원지다.


둥청은 강희(康熙) 연간 대학사 겸 예부상서였던 장영(張英·1637~1708)의 고향이다. 장영이 어느날 고향에서 편지를 받았다. 새로 집을 짓는데 이웃 오(吳)씨 집안과 다툼이 벌어졌으니 해결을 부탁한다는 편지였다. 모두 명문 귀족 가문인 두 집안이기에 관청의 중재도 소용없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장영은 시로 답을 대신했다.


“천리 먼 집에서 온 편지가 겨우 담 때문이라니(千里修書只爲?)/ 그에게 땅 세 척 양보한들 무슨 상관이랴(讓他三尺又何妨)/ 만리장성은 지금도 여전하지만(長城萬里今猶在)/ 과거 진시황은 보이지 않네(不見當年秦始皇)”


장씨 가족은 의도를 알아채고 바로 담을 세 척 뒤로 물렸다. 오씨도 흔쾌히 세 척 양보해 담을 세웠다. 길이 100m, 폭 2m 육척항이 생긴 연유다.


“싸우고 또 싸우면 길이 통하지 않는다. 양보하고 또 양보하면 육척 골목이 뚫린다(爭一爭 行不通. 讓一讓 六尺巷)” 1956년 마오쩌둥(毛澤東)은 파벨 유진 주중국 소련대사를 만나 육척항의 철학을 전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겸양과 평등을 지키는 것이 도리라는 의미였다.


유진은 1953~59년 주중 대사를 역임했다. 마오의 ‘모순론’ ‘실천론’을 소련 기관지에 번역해 실었던 중국어에 능통한 철학자였다.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0년 8월 마오는 베이징에 나와 있던 유진을 약견(約見)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계속 조선에 병력을 증파한다면 조선 인민군만으로는 대처하지 못할 것”이라며 “그들(북)은 중국의 직접 원조가 필요하며 그래야 미군을 물리치고 제3차 세계대전 폭발을 늦출 수 있을 것”이라 했다고 전한다.


올들어 육척항의 ‘화(和)’ 철학을 내세우는 중국이다. 동북아에 짙어지는 화약내를 막는 길은 결국 용기있는 측의 양보일 터다.


신경진 베이징특파원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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