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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자객 섭은낭' 허우 샤오시엔 감독 "무협도 현실처럼…내 영화의 중심은 인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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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객 섭은낭'의 허우 샤오시엔 감독. [사진제공=라희찬(STUDIO 706)]

‘자객 섭은낭’(2월 4일 개봉)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무협영화는 허우 샤오시엔(69) 감독과 거리가 가장 먼 장르라 생각했다. 허우 감독은 그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만의 새로운 무협영화를 완성했다.

당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한 무협영화 ‘자객 섭은낭’에서 주인공 은낭(서기)은 무술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수지만 칼을 들기까지 누구보다 조용히 상대를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그것은 마치 그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간이라기보다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찾는 시간 같다. 그리하여 그의 스승 가신공주(허방의)는 은낭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의 검술은 완벽하나 마음이 문제로구나.”

은낭은 대의명분을 좇는 협(俠)과 자신의 마음, 두 길 중 어떤 길을 가야할지 고민한다. 그것이야말로, ‘비정성시’(1989)를 비롯해, 대만과 중국의 현대사에 휘말리는 대만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관찰해 온 세계적 거장 허우 감독이 오늘날의 관객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다. 인간의 마음을 살아라. 1월 말의 혹한을 뚫고 8년 만의 신작과 함께 내한한 거장 감독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당나라 때의 소설집 『전기(傳奇)』(배형이란 사람이 당대의 기이한 이야기를 엮은 단편집)에 실린 ‘섭은낭(?隱娘)’이 원작이라고.
“학창 시절 당나라 소설을 즐겨 읽었다. ‘섭은낭’이란 주인공의 이름 자체가 ‘숨어서 듣는 여자’란 뜻이다. 그 뜻처럼 은낭은 은밀히 숨어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가만히 살핀다. 그 점이 인상적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자객의 이야기라는 점도 무척 흥미로웠다. 은낭은 어려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고향을 떠나, 자객이 되는 훈련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재회한다. 대학 시절 ‘섭은낭’을 읽었을 때부터 언젠가 한 번은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극 중 기둥 위나 반투명 장막 뒤에 가만히 숨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은낭의 모습이 꼭 감독으로서 당신을 닮은 것 같았다.
“하하. 그렇네. 촬영장에서 나는 배우들이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곳에 자리 잡는다. 그게 최선이라 생각한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은낭이라는 인물에 나 자신을 투영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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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객 섭은낭`. 초반은 흑백으로 펼쳐지다가 은낭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로는 컬러 화면으로 바뀐다.

평소에도 은낭처럼 사람들을 관찰하나.
“물론이다. 습관이 됐을 정도다. 누군가를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오래 관찰해야 한다. 그런 습관이 몸에 배지 않으면 영화감독이 될 수 없다.”
‘자객 섭은낭’은 당신의 첫 무협영화다. 지금껏 ‘동년왕사’(1985) ‘비정성시’ ‘희몽인생’(1993) 등 대만의 근현대사를 바탕으로 극도로 사실적인 영화를 만들어 오지 않았나. 그런데 왜 지금 무협영화인가.
“내게 무협은 아주 친숙한 장르다. 어려서부터 무협 소설을 즐겨 읽고, 중국의 호금전 감독이 연출한 무협영화와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등이 만든 여러 무협영화를 봤다. 첫 장편인 로맨틱 코미디 ‘귀여운 소녀’(1980)를 연출한 뒤 언젠가 무협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주의적 기질 때문에 못하다가 이번에 시도한 것이다.”
‘자객 섭은낭’은 과연 사실주의자인 감독이 만든 무협영화답다. 중국 무협영화 특유의 과장된 와이어 액션이나 현란한 결투 장면을 볼거리로 과시하지 않는다.
“무협이라 해도 현실과 동떨어진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인물들이 중력을 무시하고 훨훨 날아다니거나 공중 곡예를 하듯 무술을 뽐내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난 배우들의 두 발이 땅에 닿아 있는 것이 좋다. 이 영화의 중심은 액션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심인가.
“인간. 내 영화의 중심에는 늘 인간이 있다. 그 점에서 ‘자객 섭은낭’은 내 전작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장르가 무엇이든 영화의 본질은 사람의 감정,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담아내는 데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은낭은 아주 흥미로운 고민을 한다. 냉정한 자객이 될 것인가, 인간의 마음을 지킬 것인가.
“스승인 가신공주의 명령으로 부도덕한 관료들을 암살하는 은낭은 자신이 이 사람들을 죽여야만 하는지 끊임없이 갈등한다. 그 고민을 통해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은낭이 지키는 인간의 마음이란, 상대를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인 것 같다.
“현대인에게 부족한 성품이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이유로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데, 현대인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한다. 그건 잔인한 폭력이다. 그런 개개인의 성향이 모여 한 집단·사회·국가의 태도가 결정되는 것 같다. 미국 정부가 제3세계로 자신들의 자본주의를 확대하려는 것이나, 이슬람 무장 단체 IS가 세계 곳곳에서 폭력 행위를 저지르는 것 역시 그런 강요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은낭은 극 중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 누구의 편에도 서지 못하고 가장 외로운 존재로 남는다.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그렇지 않나. 더욱이 은낭은 누구보다 착한 심성을 타고났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객으로서 완벽한 검술을 익혀야 했다. 인간의 마음을 지닌 채 자객이 될 수는 없기에,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은낭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인물들이 절경을 누비는 영상이 인상적이다. 속세 너머의 신비한 세상을 엿보는 듯했다.
 “고대 자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대만과 중국 대륙을 샅샅이 뒤졌다. 은색 자작나무 숲과 호수가 보이는 야외 장면은 중국 후베이 지역의 내몽골 자치구에서 찍었다. 그곳에 가자마자 중국의 옛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붓으로 그린 듯한 산과 물의 형세가 장관을 이뤘다. 가신공주의 암자가 보이는 산속 장면은 실제 해발 2000m의 산에서 찍었는데, 그 장면에서 일순간 바위를 감싸는 안개 역시 CG(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게 아니다. 그토록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인물과 배경의 모든 요소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미장센은 당신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나는 대상을 먼 거리에서 찍는 롱숏과 한 장면을 길게 찍는 롱테이크를 선호한다. 그러면 인물들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필 수 있고, 한 장면에 많은 것이 응축돼 영화에 깊이가 생긴다.”
확실히 인물에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것을 선호하는 게 눈에 띈다.
“스크린이 얼마나 넓은데 꼭 인물의 코앞에까지 카메라를 들이밀 필요가 있을까(웃음). 난 내 영화가 등장인물에게 취하는 거리가 그렇게 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인물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 꼭 필요한 거리다. 요즘은 영화든 TV 드라마든 클로즈업을 남발한다. 내 눈에는 그게 꼭 ‘이 인물은 착한 주인공, 이 인물은 악한 사람’ 하는 식으로 관객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그렇게 간단히 단정 지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 최근 본 미국 TV 시리즈 ‘블랙리스트’(2013~, NBC)는 예외적으로 클로즈업을 남용하지 않는, 괜찮은 작품이었다.”
액션 역시 롱숏,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사전 준비도 많이 했지만 한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해 찍은 결과다. 리허설을 하는 대신 실제 촬영을 여러 번 했다. 은낭을 연기하는 서기가 특히 고생이 많았다. 얼굴에 뭐가 날아오면 본능적으로 움찔하는 표정을 짓기 마련인데, 내가 ‘은낭은 무술 고수라 표정이 변하면 안 된다’고 해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다시 찍었다. 진검으로 촬영한 건 아니지만 촬영용 목검에 부딪혀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감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꼽는다면.
“가장 아름다운 것도 인간이요, 가장 아름답지 않은 것도 인간이다.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짓는 표정이나 행동은 정말 아름답다. 그것은 그 사람의 기질과 성장 배경과 그 사람의 모든 역사가 나이테처럼 쌓여 형성된 것이다. 반면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모습이 특히 도드라져 세상을 좁은 시야로 바라본다. 그런 인간의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중 은낭의 고향은, 당나라 황실이 지방 세력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번진(藩鎭) 중 세력이 가장 컸던 ‘위박’이다. 영화 속 황실과 위박의 관계가, 당신이 여러 작품들을 통해 탐구해온 중국 대륙과 대만의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웃음). 내 전작의 주인공들은 중국과 대만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불행한 삶을 사는 인물들이었다. 그와 달리 은낭은 훨씬 능동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다. 그건 인물 자체의 특성이라기보다 당나라 시대의 특징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역사적 사건을 그릴 때는 직접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난해에 대만의 역사를 담은 영화를 찍으려 했는데, 투자자와 뜻이 맞지 않아 구체화하지 못했다.”
은낭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당신의 영화는 인물의 행동이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수수께끼 같은 데가 있다.
“수수께끼 내는 걸 좋아한다(웃음). 영화에서 뭔가를 똑 떨어지게 표현하기보다 애매하게 드러내야 관객이 그 안에서 더 많은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너무 많은 걸 명확하게 표현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봐라. 중간에 영화의 이야기를 전부 예측하게 되는 순간부터 재미가 없어지지 않나.”
실생활에서 부인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그보다 훨씬 직접적인 것 같은데. 수십 년 동안 부인의 머리를 직접 잘라준다고 들었다.
“내가 영화에서 하듯 부인에게 애매하게 굴었다가는 나를 바로 째려볼 거다. 하하하. 내가 머리를 자르는 사람이 딱 두 명인데, 나와 부인이다. 워낙 젊을 때부터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기술이 좋은 편이다. 얼마 전 내가 혼자 해외 영화제에 갔을 때 부인이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기에 섭섭해서 한마디했다. 세계적인 거장 감독이 머리를 잘라 준다는데 왜 다른 데서 머리를 자르고 오냐고(웃음).”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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