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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공포의 균형, 평화의 균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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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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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대기자

전쟁은 정치의 한 수단이다. 병법을 가르친 손자는 “백번 싸워 백번을 이긴다 하더라도 그것이 최고의 방법은 아니다”고 말했다. 적을 파괴하는 것보다 적을 온전하게 둔 채 이기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약소 6국은 합종책(合從策)을 따랐으나 소진이 죽자 장의의 연횡책(連衡策)으로 돌아섰다. 그 뒤 이간책에 빠져 차례로 강대국 진(秦)에 흡수됐다. 외교적 구도를 잘못 짜면 싸우기도 전에 질 수 있다는 말이다. 북한이 4차 핵실험에 이어 장거리 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그 자체로 충격적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대목은 동북아 국제 질서가 흔들린다는 점이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으로 동북아 안보 질서는 크게 바뀌었다. 물론 구(舊)소련이 무너진 영향이다.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중국은 한국의 제1교역국으로 부상했다. 기존 냉전 구도가 완전히 깨진 것으로 보였다. 특히 북한이 고립돼 외교적으로 압승했다고 자신했다. 북한이 곧 무너질 것이라며 흡수통일을 꿈꾸는 세력까지 생겼다. 북방정책을 추진할 당시 그렸던 교차 수교와 평화체제라는 틀은 잊어버렸다.

그런데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이런 꿈이 어그러지고 있다. 한·미·일 대(對) 북·중·러 대립 구도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 직후 중국도 북한을 비난했다. 그런데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가 거론되면서 중국은 북한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보다 더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장의의 공작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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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염원은 통일이다. 작은 나라가 합치려면 주변 강대국이 거부하지 않아야 한다. 국제법적으로 남북한은 엄연히 독립된 유엔 회원국이다. 북한에 급변사태가 있어도 우리에게 기회가 당연히 오는 건 아니다. 중국이 미군 무기가 국경 근처에 배치되도록 방치할 리 없다. 최근 거론되는 몇 가지 제안은 이런 큰 구도를 무시하고 있다.

지난 7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우리도 핵무기를 갖자는 주장이 나왔다. “북한이 핵무기라는 권총을 겨누고 있는데, 우리가 언제까지 제재라는 칼만 갖고 있을지 답답하다. 핵을 가질 때가 됐다”(원유철 원내대표)고 말했다. ‘공포의 균형’을 이루자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누구의 공포인가. 북한이 핵무기를 먼저 쏘고 나면, 우리가 북한을 향해 핵무기를 발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고민도 필요 없다. 자체 핵무장은 미국이 용납하지 않는다. 북한이 겪는 경제 제재와 고립을 각오해야 한다. 더군다나 북한에 핵 개발 명분을 주게 된다. 이런 사정을 아는 북한에 협박용으로 먹힐 것 같지도 않다.

그 대안으로 주한미군에 핵무기를 재배치하자고 한다. 이야말로 북한이 핵 개발을 시작한 명분이다. 노태우 정부 때 주한미군 핵무기를 철수한 것도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와 한반도 비핵화를 포기하자는 말인가.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포기인 셈이다. 왜 한반도에서 핵전쟁의 시나리오를 써야 하나.

방어 논리로 사드배치론이 나온다. 국방부는 7일 “북한의 미사일 도발을 계기로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공식 논의키로 결정했다”고 밝혔고, 미 국방부도 8일 사드의 주한미군 배치가 “최대한 빨리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제는 요격 능력이다. 전문가들은 사드에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한다. 핵미사일을 요격해도 문제다. 요격 지점인 미사일 낙하 구간은 어차피 남쪽 영공이다. 쓸 만한 것은 레이더 능력뿐이다. 태평양을 넘어가기 전에 방어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미국용 방어망이라는 말이다.

한반도에 핵폭탄이 터지면 민족의 공멸이다. 공포의 균형은 의미가 없다. 결국 외교적 수단밖에 없다. 하지만 협상이든 압박이든 중국의 역할이 핵심이다. 사드는 미사일 방어에 도움이 안 되면서 중국을 북한 쪽으로 밀어내는 작용만 한다. 통일에는 더 큰 장애다.

B-52 폭격기가 위협 비행을 하고, 항공모함을 전진 배치한다고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까. 중국을 무시하고 직접 군사적 타격을 할 만큼 미국이 적극적이지도 않다. 우리에게는 더 수단이 없다. 대북 확성기를 틀고, 대북 전단을 뿌리는 게 전부다. 화풀이라면 몰라도 그게 핵정책을 바꿀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개성공단을 포기하는 건 우리 카드만 버리는 꼴이다.

선택은 두 가지다. 미·중 대결의 한편에 서서 공포의 균형을 도모하느냐, 다자안보의 평화의 균형을 만드느냐. 냉전적 대결을 강화하면 오히려 북한이 살아난다. 중국이 북한 편에 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통일정책은 평화 공존의 단계적 통일론이었다. 그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역내 관계 정상화, 평화 보장 체제 구축으로 위험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돌아가도 그게 빠른 길이다.

김진국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