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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은 중도에 가까운 진보…"한대련 활동 안 할 것” 8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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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5월 31일 한양대에서 학생 5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대협 6기 출범식이 열렸다. 출범식 뒤 학생들이 가두행진을 하려다 이를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있다(왼쪽). 2011년 6월 8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한대련 소속 학생 500여 명이 ‘조건 없는 반값 등록금 실현’을 외치며 촛불을 들고 있다.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던 운동 방식이 문화제 형태로 바뀌었다. [중앙포토]

대학생 김민성(25)씨는 자신이 진보적 이념 성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씨는 차기 대선 후보로 야권 인사를 지지한다. 지난 세월호 참사 땐 정부기관의 대응을 비판하는 카카오톡·트위터 메시지를 지인들과 공유하기도 했다. 서울시청 앞에서 이뤄지는 노동조합단체 등의 서명에도 10차례 이상 참여했다.

학생운동의 어제와 오늘 <하> 요즘 대학생 생각은

하지만 김씨는 학생운동이나 학생회 활동엔 관심을 잃은 지 오래라고 말했다. 그는 “다양한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고 문제의식도 갖고 있지만 이런 것들이 반드시 학생운동단체를 통로로 해서 해결돼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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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스스로 생각하는 이념 성향 등에 대해 지난 1월 15~30일 전국 대학생 남녀 350명을 대상으로 온·오프라인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김씨처럼 자신을 ‘진보적 성향’이라고 생각하는 대학생들이 1980~90년대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학생운동에 관심이 없거나 비판적인 사람은 과거보다 큰 폭으로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 대상 대학생들은 0~10점(0점=매우 진보, 10점=매우 보수)까지 자신의 이념 성향에 해당하는 점수를 선택했다. 그랬더니 응답자의 평균 점수는 4.21점으로 중도에 가까운 진보였다. 자신이 진보(0~4점)라고 답한 사람은 212명(60.6%)이었고 보수(6~10점)라고 답한 사람은 66명(18.9%)이었다. 중도(5점)라는 응답은 72명(20.5%)이었다.

김민전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진보적인 이슈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남북 문제 등 개별 사안에 대해선 일부 보수적인 경향을 띠기도 하는 요즘 대학생들의 성향이 중도에 가까운 진보(4.21점)라는 이념 점수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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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단체인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에 대해선 무관심한 대학생이 많았다. ‘한대련의 활동과 강령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엔 ‘잘 모르겠다’는 응답이 58.9%(206명)로 가장 많았다. 보통이다(24.0%, 84명), 지지 및 매우 지지한다(8.8%, 31명), 반대 및 매우 반대한다(8.3%, 29명) 순으로 뒤를 이었다. 한대련을 비롯한 학생운동단체에서 활동할 의향을 묻는 질문엔 88.3%(309명)가 ‘없다’고 답했다.

한대련의 현 의장(김한성 전남대 총학생회장) 이름을 묻는 질문엔 응답자의 97.7%(342명)가 ‘모른다’고 응답했다. 2.3%(8명)만이 ‘안다’고 답했다.

전대협 초기 의장(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이름을 묻는 질문엔 98.6%(345명)가 ‘모른다’고 했다.

대학생들은 학생운동이 거대담론보다는 대학생의 현실 문제나 정부 정책 등 생활 관련 이슈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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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이 집중해야 하는 이슈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57.4%(201명)가 ‘등록금, 주거 문제 등 교육환경 문제’라고 답했다. 이어 ▶정부 및 국회 정책 등 견제(17.1%, 60명) ▶노동자, 사회적 약자의 인권 문제 해결(16.0%, 56명), 주한미군 철수 및 자주국가 수립(4.3%, 15명) 순이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전대협처럼 학생운동 의장들이 연예인·정치인에 버금가게 주목을 받던 시절은 끝났다”며 “요즘 대학생들은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과는 별개로 문제 해결 능력이 줄어든 학생운동에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또 “학생운동단체가 주도하는 거대담론에 거부감을 느끼는 학생이 많다”며 “특정 단체에 소속되기보다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개별적으로 참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05년 이후 학생운동의 축을 담당하고 있는 한대련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한대련은 ‘(운동권과 비운동권을 넘어선) 300만 대학생의 단체’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여전히 일반 학생들의 참여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0년 한대련에서 활동한 이모(29)씨는 “학생운동을 한다는 자부심은 있었지만 운동권이 아닌 일반 학생들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 내는 데 늘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다.

2013년 한대련에서 활동했던 한 간부는 “2012년 5월 전 통합진보당(통진당) 폭력사태로 인해 한대련이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과격하다는 이미지가 형성돼 조직이 위기를 겪었다”며 “전국 단위 행사는 물론이고 서울 지역 행사도 인력 동원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대련의 위기는 일부 대학 총학생회의 탈퇴로 이어졌다. 숙명여대는 2011년 7기 한대련 의장으로 박자은 총학생회장을 배출하는 등 한대련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2014년 5월 한대련에서 탈퇴했다. 87년 이후 NL(민족해방) 계열 학생회의 ‘본산’이라고 불린 고려대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2012년 9월, 한국외대 총학생회는 2013년 11월 숙명여대의 뒤를 이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진보를 규정하는 스펙트럼이 다양화된 상황에서 학생들의 고단한 삶이나 정부 정책의 실질적 변화 등을 이끌어 내는 성과 없이는 학생운동의 위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손국희·공다훈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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