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의 소리] 언제까지 '열손가락' 지문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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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 유학 시절, 지도교수의 집에 저녁초대를 받아 갔다. 미국에서 다른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은 '최고의 예우'라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마음이 우쭐했었다.

집으로의 초대가 '최고의 예우'가 될 수 있는 것은 집이야말로 그 사람의 사생활이 이뤄지는 원초적 공간이며, 어떻게 보면 바로 프라이버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미국 등 서구국가들에서 프라이버시권의 위력은 대단하다. 일찍이 개인주의가 발달해온 서양에서는 공개된 집단생활에 익숙한 동양인들이 알지 못하는 '사적 영역(私的 領域.private territory)'을 중시했으며 이 '사적 영역'에 대한 타인의 침입을 프라이버시권을 통해 배제해 갔기에 프라이버시권의 법리가 깊이 발달했다.

반면 이념적으로 개인주의가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데다 좁은 국토에 인구밀도마저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대가족제도 하의 공개된 집단생활이 강조돼 프라이버시권의 개념이 발달할 여지가 적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전자정부화가 급진전되면서 국민의 정보관리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권위주의적 행정에 대해 우리 국민은 프라이버시권 침해를 따진다는 등의 별다른 문제제기 없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어 문제다.

전국 모든 학생들의 '사적 영역'에 대한 자료를 국가가 전산화해 갖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NEIS가 결국 관철되는 것이 그렇고, 방범 등을 이유로 골목 귀퉁이에 수백개의 CCTV를 설치해 오고가는 행인들의 행태를 찍어놓겠다는 경찰 당국의 계획이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도 그렇다.

정부에 의한 국민 프라이버시권 침해의 또다른 예가 바로 17세에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을 때, 열손가락 전부를 검게 칠해 가며 찍는 지문날인제도다.

프라이버시권이란 '사적 영역'에서 자기만이 비밀스러이 간직하고자 하는 사항이나 성명.초상 등 자신의 인격적 징표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자신의 뜻에 반해 공개당하지 않고,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이 그 '사적 영역'의 관리자이자 통제자로서 역할할 수 있는 권리다.

인간의 지문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따라서 '지문'자체가 그 사람을 드러내는 인격적 징표가 될 수 있어 프라이버시에 속한다.

동사무소에서 채집된 우리의 열손가락 프라이버시는 우리의 동의 없이 경찰로 넘어가 전산자료로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우리의 지문은 범죄사건이 있을 때마다 범인의 지문으로 취급받으며 컴퓨터검색기에 돌려진다. 분명한 프라이버시권의 침해다.

열손가락 지문날인제도는 법적 근거도 매우 약하다. 주민등록법 제17조의 8 제1항에서 '지문'을 성명.주민등록번호 등과 함께 주민등록증에 수록한다고 규정한 것이 전부다. 법조문 어디에도 '열손가락' 모두의 지문을 찍어야 한다거나, 지문이 꼭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주민등록법 제3조는 주민등록사무의 지휘권과 감독권이 행정자치부장관에게 있다고 규정하면서, 주민등록사무가 행정자치부의 소관사항임을 명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행정자치부의 외청인 경찰청에 보관하는 것은 법의 정신에 반한다.

효율성의 면에서 보더라도 지문날인제도가 수사에서의 범인검거 등을 통해 '정부의 이익'에 크게 기여한다는 증거도 없다. 지문정보 이용 덕에 범인을 검거하는 비율은 전체사건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지문을 비롯한 온갖 개인정보의 불법적.위헌적 수집과 그것의 통합관리로 국민 개개인을 발가벗기는 일을 당장 중단해야한다. 국민은 더 이상 권리 위에 잠자고 있지 않을 것이다.

임지봉 건국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