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당신] 허벅지 굵으면 당뇨병·심장병 위험 낮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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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 31인치, 장미란 28인치, 이동국 28인치, 박지성 26인치, 이상화 23인치…’ 허리둘레 같은 이 수치는 모두 이들이 전성기 때 잰 한쪽 허벅지 둘레다. 운동선수에게 이는 훈장과도 같다. 선수로서의 능력과 성적을 대변해서다. 잘 발달한 허벅지 근육은 힘과 순발력의 근간이 된다.

커버스토리-‘건강의 척도’ 허벅지 근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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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벅지 근육이 운동선수에게만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일반인에게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허벅지 근육과 둘레는 건강 상태를 좌우하고, 질병의 예방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전문가들이 허벅지 근육을 ‘건강의 척도’라고 부르는 이유다.

2001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유럽비만학회장. 이곳 한쪽에서는 허벅지와 만성질환의 상관관계에 대한 발표가 진행되고 있었다. 허벅지가 굵은 사람, 허벅지 근육량이 많은 사람이 당뇨병과 대사증후군에 걸릴 위험이 적다는 연구결과였다.

이 결과를 놓고 학회장에서는 토론이 벌어졌다. 참여한 상당수 전문가들은 이 결과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만해도 허벅지 둘레는 건강지표로 거론되지 않았던 때다. 허리둘레와 체질량지수(BMI)가 의미 있는 지표로 간주되던 시절이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허벅지 둘레(근육량)는 근거가 충분한 주요 지표로 자리잡았다.

허벅지 근육, 몸 균형 지탱하는 중심

허벅지 근육이 어떻게 신체 건강을 좌우하는 지표가 될까. 우선 근골격계에서 허벅지 근육이 갖는 의미가 크다. 허벅지 근육의 위치와 기능 때문이다.

허벅지 근육은 기본적으로 아래로는 무릎관절을 구부리고 펴는 기능, 위로는 고관절의 늘리고 수축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두 관절을 동시에 아우른다. 이 과정에서 허벅지 근육은 두 관절, 특히 무릎관절에 작용하는 충격을 완화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관절에 작용하는 충격을 흡수하는 것은 오롯이 근육 몫이다. 허벅지 근육은 신체의 하중이 무릎에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도록 최소화한다.

그런데 허벅지 근육이 약화되면 그 자체만으로 무릎에 통증이 생긴다. 허벅지 근육이 제 기능을 못해서다. 슬개골(무릎뼈)이 움직이는 방향과 힘의 전달에 이상이 생겨 슬개골과 대퇴골(넙다리뼈)이 맞물리는 균형이 깨진다. 하체의 중심이 흔들리는 것이다.

고대안암병원 스포츠의학센터 장기모 교수는 “허벅지 근육이 약해지면 다른 질환이 없어도 무릎 통증이 생긴다”며 “이것이 바로 전방통증증후군과 슬개대퇴증후군이 생기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깨진 균형은 도미노처럼 퍼진다. 고관절의 외전근이 약해져 대퇴골이 안쪽으로 틀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무릎의 부담과 통증은 더욱 가중된다. 퇴행성 관절염이 앞당겨지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다. 허벅지 근육 약화로 통증이 생기면 운동하기 어렵고, 근력은 더욱 약해져 무릎을 받치는 힘이 약해지고, 관절이 닳는 속도는 더 빨라진다.

장 교수는 “퇴행성 관절염 환자를 보면 허벅지에 근육이 없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근육이 약해져 무릎에 무리가 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무릎에 퇴행성 관절염이 생기면 신체 상호 균형이 깨져 허리와 발목의 퇴행까지 동반되는 2차적 변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허벅지 근육에서 비롯되는 나비효과인 셈이다.

에너지 소모 기능 떨어져 대사작용 악영향

다음은 대사작용 측면에서의 중요성이다. 기본적으로 근육은 몸에서 에너지를 소모하는 기관이다. 몸 근육의 70%가량이 하체(허리 이하)에 존재하고 35~50%가 허벅지에 있다. 허벅지는 그야말로 근육을 상징하는 곳이다. 허벅지 근육이 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잖은 이유다.

허벅지 근육이 감소하면 대사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당연히 에너지 소모 기능이 저하된다. 그러면 몸은 남는 에너지가 지방으로 축적돼 비만으로 이어진다. 지방은 근육과 혈관·내장·간 등에 쌓인다. 기계는 기름을 칠하면 잘 돌아가지만 몸은 반대다. 기름이 끼는 곳에 문제가 생긴다. 혈당이 높아지고 콜레스테롤 대사가 떨어져 수치가 올라간다. 고혈압·당뇨병·뇌경색·심근경색 등 혈관질환의 경보음이 울리는 것이다.

강북삼성병원 내분비내과 박철영 교수는 “나이가 들면 근육이 줄어드는 근감소증이 생기는데, 나이가 들수록 활동량이 떨어져 근감소 효과가 크다. 노인에게서 혈당·혈압과 관련된 질환이 잘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라며 “어떤 노인이 허벅지가 가늘다면 건강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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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지 근육 섬유 사진. 몸에 있는 근육 중 가장 크고 힘이 세다.

연구결과, 허벅지 굵을수록 혈중 지방 낮아

허벅지 근육의 중요성을 입증한 연구는 많다. 연세대 보건대학원 역학건강증진학과, 국민건강증진연구소, 한국의학연구소는 2012년 ‘허벅지 둘레와 혈청 지질과의 관련성 분석’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해 발표했다. 연구팀은 30~79세(평균 42.3세) 남녀 31만4842명을 대상으로 허벅지 둘레, 허리둘레, BMI, 혈청지질농도(총콜레스테롤, 중성지방, LDL 콜레스테롤, HDL 콜레스테롤), 혈당, 혈압을 측정한 뒤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대규모 일반인을 대상으로 허벅지 둘레와 지질 농도의 관련성을 분석한 드문 연구다.

그 결과, BMI를 보정한 모형에서 허벅지 둘레와 총콜레스테롤이 음의 관련성을 보였다. 허리둘레를 보정했을 때도 결과는 같았다. 즉 허벅지 둘레가 클수록 총콜레스테롤과 허리둘레 수치가 적다는 의미다. 또 허벅지 둘레가 클수록 중성지방 수치가 낮고, 높을수록 몸에 좋은 HDL 콜레스테롤 수치는 증가했다. 연구팀은 “허벅지 둘레가 클수록 중성지방과는 음의 관련성, HDL 콜레스테롤과는 양의 관련성을 보였다”며 “근데 동일한 허리둘레라고 해도 허벅지 둘레 크기에 따라 중성지방 농도에 큰 차이를 보였다”고 밝혔다.

이 결과는 외국의 연구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덴마크 코펜하겐 예방의학연구소는 12년6개월간 건강한 남녀 2800명을 대상으로 분석하고, 허벅지 둘레가 60㎝보다 작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높았다고 발표했다.

‘운동=유산소‘ 인식 버려야

근육은 풍선과 같다. 바람을 꽉 채워 넣기는 어렵지만 빠지는 것은 일순간이다. 근육도 마찬가지다. 사용하지 않으면 바로 눈에 띄게 사라진다. 이상민 농구감독이 대학선수 시절 발목을 접질려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허벅지 둘레가 8㎝나 줄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일반인 역시 수술 후 1~2주의 회복기간에 운동을 못하는 것만으로 허벅지 근육이 빠져나간다. 하체를 위주로 근육 강화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하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운동 하면 유산소 운동부터 떠올리는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또 몸매 관리에만 집착해 근육운동을 기피하는 것도 문제다. 장 교수는 “허벅지를 건강하게 하려면 유산소 운동과는 별도로 근육 강화운동을 해야 한다”며 “걷기 같은 유산소 운동은 근육 강화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다이어트에서도 운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이유는 운동을 안 하면 지방대신 근육이 빠지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박 교수는 “근력운동은 보디빌더나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며 “몸매를 가꾸기 위한 근력운동이 아니라 생존과 질환 예방능력을 키우기 위한 운동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류장훈 기자 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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