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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텔링] 후배가 증권사 부장이라 믿었는데, 35억원이 휴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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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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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김 지점장 이리 와봐. 인사해. 우리 고향 형님이야. 거기 이 팀장, 최 과장도 인사해요. 얼른.”

사업 부진에 우울증 앓던 사업가
하루 3~4차례 안부 전화에 호감
“잃은 돈 만회 돕겠다” 투자 유혹
25억 일임매매 손실 추궁하자
“국내 최대 증권사가 사기 치겠나”
재판서 위장 이혼, 도피 준비 드러나
울면서 쓴 ‘자인서’도 “폭행 탓” 주장

 2011년 말 ‘OO증권’ 삼성동 지점에 들른 사업가 A씨는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눠야 했다. 직접 와서 ‘차 한잔 하고 가시라’는 고향 후배 형주(49·가명)의 말이 생각나 잠시 들른 것인데 두루 인사를 시켜줬다. 그의 명함엔 ‘OO증권 영업부 부장’이라고 찍혀 있었다. “제가 OOO, OOO에게도 수십억 벌어줬습니다. 퇴직이 가까운 ‘갈참’인데도 직원들이 따르는 이유죠.”

 그렇게 능력 있는 증권맨 형주는 처음엔 아무 조건 없는 ‘동생’으로 다가왔다. 사업 부진, 투자 손실에 개인사까지 겹쳐 우울증을 앓았던 터에 하루 3~4차례씩 안부를 묻는 형주에게 A씨는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아내가 홀어머니에게 너무 막 대해 걱정입니다.” 집안일까지 흉금을 터놓는 동생은 5남1녀의 막내아들이라는 것까지 A씨와 같았다. 동질감이 커졌다.

 밥을 같이 먹고 술을 같이 마시고 운동도 같이 한 지 1년이 다 돼 갈 무렵.

 “아깝게 잃은 돈, 만회는 하셔야죠. 제가 도울게요. 저 이 바닥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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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다른 증권사에 주식 매매를 일임했다가 수억원의 손해를 본 아린 속을 훤히 아는 듯 형주가 파고들었다. “두 번 다시 주식은 안 한다”던 마음이 흔들려 25억원을 맡겼다. 결과는 6개월에 4억6000만원 손실. “내 책임이니 남은 돈만 돌려달라”는 A씨의 쓰린 마음에 대고 형주가 속삭였다.

 “형, 일반적 주식 투자로는 한계가 있어. 미국에서 유행하는 ‘롱숏 헤지펀드’를 우리 회사가 국내 최초로 기관투자가들과 함께 운용해. 아는 선배가 운용책임자야. 13억원만 더 투자하면 5개월 뒤에 7억 불려 드릴게. 대신 명의는 내 명의로 해야 해. 선배가 형님을 모르잖아.”

 미심쩍게 쳐다보는 A씨에게 형주는 “형. 국내 최대 증권사가 돈 몇 억 때문에 문제를 만들까 봐?”라고 되물었다.

 ‘설마 OO증권이 사기를 칠까’ 싶었던 A씨는 반쯤 형주에게 기울었다. 남는 불안감은 “절대로 선물 옵션과 위법한 거래는 하지 않는다”는 형주의 각서에 같이 묻었다.

 투자는 순조로운 듯했다. 5개월 만기가 된 2013년 12월 형주는 돈 대신 ‘OO증권의 로고’와 형주의 지장·직인이 찍힌 ‘자산현황표’를 내밀었다. 원금에서 5억원 늘어난 43억원이 적혀 있었다.

“형님, 5개월만 더 돌리면 57억원입니다. 천재일우입니다. 이번에 빠지면 다시 못 들어가니 5개월만 더 돌립시다.”

 OO증권의 자산현황표엔 5개월 뒤 ‘57억원’, 그 뒤엔 ‘100억원’ ‘170억원’ ‘275억원’이 잇따라 찍혔다. “조금만 더…”라는 호소에 보탠 원금이 어느새 55억원으로 불었다. 새 사업을 구상하던 A씨에게 “300억원 되면 단독으로 헤지펀드를 만들자”는 형주의 말도 실현 가능한 꿈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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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씨가 정신이 든 건 마지막 만기가 돌아온 지난해 3월.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의 자본금이 부족해 돈을 빼기로 결심한 직후였다. 20억원만 입금한 형주는 “펀드에서 돈을 빼는 데 시간이 걸리니 나머지 원금은 순차로 드리고 수익금 257억원은 무기명 채권으로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 피하는 형주를 만나 세 시간 담판 끝에 나온 고백에 A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형님, 죽을 죄를 졌습니다. 선물 옵션에 넣었다 그게 남은 돈 전부입니다. 원금은 꼭 회사에서 받아드릴게요. 제가 총수 비자금을 관리했던 놈입니다. 비자금 장부 다 묻어놨으니 감사 청구하면 줄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비자금 장부 묻어놓은 곳으로 가자.”

 하지만 경기도 용인시의 한 야산에서 나온 건 황급히 묻어 둔 휴지 조각이 전부였다.

 “야 인마. 친형도 나만 못하다더니 너 도대체 왜 이래.”

 “형님. 한 번만….” 형주의 눈물도 이젠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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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씨가 사기 혐의로 고소해 검찰 수사가 진행됐고 형주는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아니 사업하는 양반이 어떻게 이런 놈한테 55억원을 맡깁니까.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난해에만 300억원대 투자 사기 친 증권사 과장 등 네댓 건이나 적발됐어요.”

 검찰 수사관의 면박에 A씨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형주는 위장 이혼을 하고 해외 도피까지 준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화병으로 네 번이나 입원했던 A씨는 재판에서 형주가 울면서 쓴 ‘자인서’마저 “A씨의 폭행에 못 이겨 쓴 것”이라고 주장하자 기가 막혔다.

지난 14일 형주는 1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를 친형처럼 살갑게 위해주는 데다 대형 증권사 부장이라서 철석같이 믿었다. 돈보다 배신이 더 섭섭하다. 항소심 재판부가 더 엄중히 죄를 물어줬으면 한다.” 법정을 나서는 A씨의 뒷모습은 휘청였다.

임장혁 기자·변호사im.janghyuk@joongang.co.kr

※이 기사는 14일 재판 결과와 A씨 인터뷰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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