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인사이드] 대법원, 여성 상반신 몰래 찍어도 가슴 강조 안 되면 무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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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회사원 A씨에게는 ‘은밀한 취미’가 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신체 부위를 남몰래 스마트폰으로 찍어두는 겁니다.

지하철 1호선·5호선 안이나 길거리에서 다리를 꼰채 앉아 있는 앞자리 여성의 하반신·허리 부위 등 2013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49차례 ‘몰카’를 찍었습니다. 촬영 당시 여성들은 모두 스타킹이나 레깅스, 스키니진 등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파트 엘리베이터까지 쫓아간 여성 B씨의 상반신을 찍다가 들켰고, B씨의 경찰 신고로 재판에까지 넘겨지게 됐죠. 검경이 A씨 스마트폰에서 복구한 사진만 210여 장이었습니다. 검찰은 A씨에게 성폭력범죄의 처벌등에 관한 특례법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제14조 1항)을 적용했습니다.

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해 성적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그 의사에 반해 촬영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검찰은 재판에서 “5개월 간 여성들의 가슴 부위나 다리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을 근접 촬영했다”면서 “피해자들이 통상적인 옷차림을 한 경우라도 A씨의 성적인 의도에 의해 촬영됐다면 성폭력처벌특례법이 보호해야할 대상이 된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하지만 법원의 최종 판단은 ‘무죄’였습니다. 1심은 전부 무죄를, 2심은 엘리베이터 사건만 유죄로 판단해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대법원은 전부 무죄 판결을 한 1심이 옳다면서 사건을 서울북부지법 항소부로 돌려보냈습니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에 따르면 A씨가 촬영한 사진들은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부위’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대법원의 무죄 논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촬영한 부위가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에 해당하는지는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들의 관점에서 고려해야 한다”

“피해자의 옷차림, 노출의 정도 등은 물론 촬영자의 의도와 촬영에 이르게 된 경위, 촬영 장소와 촬영 각도 및 촬영 거리, 촬영된 원판의 이미지, 특정 신체 부위의 부각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구체적ㆍ개별적ㆍ상대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이 사건의 경우, 엘리베이터에서 찍은 B씨는 사건 당시 평범한 카디건 차림에 얼굴과 손을 제외하고 외부로 노출된 신체 부위가 없었습니다. 사진도 B씨의 상반신을 찍긴 했지만 특별히 가슴 부위가 도드라지거나 강조되지는 않았죠.

이에 따라 대법원은 “A씨의 행동이 부적절하고 B씨에게 불안감과 불쾌감을 유발하는 것임은 분명하지만, 평균적인 사람들의 관점에서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는 아니다”고 판단했습니다.

A씨가 지하철 등에서 찍은 나머지 사진들도 “여성의 동의 없이 신체를 촬영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모두 지하철이나 길거리 등 일반인의 출입이나 통행이 자유로운 개방된 장소에서 촬영된 것”이라면서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앞서 비슷한 사건마다 법원은 ‘여성의 노출이 있었는지’ ‘특정 신체부위를 강조해 찍었는지’ ‘선정적인지’ 등을 기준으로 유·무죄를 판단해 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몰카를 찍었는지, 피해자가 불쾌해하는지 여부 등은 크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습니다. 전신 사진을 찍은 경우 대부분 무죄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유사한 판례로 서울북부지법 형사9단독 박재경 판사는 최근 지하철ㆍ버스에서 휴대전화로 여성을 몰래 찍은 회사원 C(55)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C씨는 지난해 7~9월 짧은 치마와 바지를 입고 앉아있는 여성들을 12차례에 걸쳐 촬영한 혐의를 받았죠.

박 판사는 “여성들의 노출 정도나 촬영 각도, 거리, 구도상 배치 등을 볼 때 다수의 여성 중 누가 피해자인지, 구별 기준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면서 “C씨의 촬영 의도도 특정한 신체 부위라기보다 ‘예쁜 여자’를 촬영한 것으로 이해된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해당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판사들도 판단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하네요. 여성 성범죄 사건에 정통한 검찰 관계자는 “현재로선 '단순한 몰카'를 처벌하는 법규가 없다”면서 “법원 입장에서도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기계적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어 일반인들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결과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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