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고르바초프는 부르주아 편에 선 박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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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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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이야기가 있는 집
664쪽, 1만5800원

만만치 않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다. 단순히 양 때문이 아니다. 소설이라는데 드라마가 없다. 전형적인 기승전결이 아니다. 실명의 출연진만 수십명이 넘는다. 일관된 서사 구조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가 툭툭 튀어 나온다. 그것도 건조하게. 작가의 시각과 감성은 좀체 느껴지지 않는다.

저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기자 출신이다. 수백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해 모은 이야기를 Q&A가 아니라 논픽션 형식으로 쓴다. 이른바 ‘목소리 소설’이라는 독창적인 장르로 개척했다는 평가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해 과연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졌다. 이 책은 2013년의 발간된 작가의 최신작이자, 소련 붕괴 이후의 상실감과 적응 과정 등을 담고 있다.

‘어느 가담자의 수기’라는 서문처럼 책은 저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소비에트 시대를 살았으나 작가는 자유주의를 받아들인 반면, 그녀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로 남기를 원했다. 이런 기류는 책 전반에 흐른다. 1부 ‘붉은색으로 장식된 열편의 이야기’는 일종의 공산주의에 대한 회고다. 등장인물 역시 대다수가 60대 이상의 노년층이다. 소련 군 원수이자 대통령 군사고문을 지냈던 이도 있으며,익명을 요구한 크렘린 행정실 소속의 인사도 증언대 앞에 선다. 그들의 얘기는 한가롭고 아름다운 옛 추억이 아니라, 내밀한 군사비밀을 폭로하듯 날 서 있다. 스탈린 시대를 잊지 못하는 향수도 전해진다. “소련이라는 나라를 최고 지도부에서 먼저 배신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부르주아 편에 선 박쥐들! 고르바초프는 누구일까요? 공산주의의 무덤을 판 자, 가롯 유다, 노벨상을 거머쥔 개선 장군…. 이 모든 것이 한사람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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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모스크바 중심가에 맥도널드 첫 매장이 들어섰을 때 모습. [사진 이야기가 있는 집]

1부가 공산주의가 무너진 직후의 혼란상이라면, 2부는 자유주의가 이입된 이후의 또 다른 풍경이다. 연령대가 낮아진다. 35세의 광고 매니저 알리사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기억하는 소비에트 사회는 아주 순진하고 서툰 사회였어요. 우리 부모들이 자본주의를 주문한 건 아니에요, 그건 저와 같이 새장 안에 갇혀 지내고 싶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주문한 거에요. 자본주의는 짜릿한 모험이고 스릴이죠.”

개별적으로 보면 언뜻 잡담처럼 들린다. 그러나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가 하나둘 축적돼가면서 사변적 수다는 역사에 대한 증언과 고백으로 질적 변환된다. 각각의 인물을 과연 어떻게 섭외했으며, 그들로부터 아픈 기억과 불편한 진실을 끄집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발품과 노고를 들였을까를 떠올리면 저자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가공된 내러티브에선 느껴지기 힘든, 사실이 주는 무게감은 묵직하다. 다만 ‘공산주의 붕괴 이후’와 ‘러시아’라는 시대적·공간적 배경이 국내 독자에센 다소 생경한 탓에 전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등에 비해선 쉽사리 다가가긴 힘들 듯싶다.

[S Box] 문학의 새로운 실험 ‘목소리 소설’

벨라루스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67)에게 지난해 노벨문학상이 수여되자 정작 당사자는 “매우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 이유는 이랬다. “그가 한 수천건의 인터뷰는 우리가 잘 몰랐던 인간 존재의 역사를 알려주는 동시에 감정의 역사, 영혼의 역사를 보여준다. 우리 시대의 아픔과 용기를 담아내는 데에 기념비적인 공로를 세웠다.”

 알렉시예비치는 전쟁과 자살, 재난을 겪은 수백명의 사람들을 다년간 인터뷰해 그들의 이야기를 써냈다. 이는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로 불리는 그만의 장르가 됐다. 실제 사람들의 목소리와 고백, 증언과 증거가 인간의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가장 문학적 방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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